토지수용이나 분쟁 과정에서 재산권 침해 우려...관련 법 개정 국회 문턱 못 넘어

지난 9월 26일 경기 남양주 왕숙지구의 건물에 대토보상 위원회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9월 26일 경기 남양주 왕숙지구의 건물에 대토보상 위원회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제공)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국가와 지자체 등에서 도시 계획을 수립할 때 민간이 소유한 토지를 강제로 취득하는 토지수용 제도가 있지만 토지 소유주가 ‘깜깜이’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평가 등 관련 제도가 복잡하고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난해한 전문용어까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관련한 전문용어는 유독 어려운 경우가 많다.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토지 소유주는 재산권 행사에서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부동산과 관련한 전문용어를 알기 쉽게 순화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지만 관련 법개정 불발 등으로 아직까지 남은 과제가 많다.

수요자 멘붕 오게한 부동산 용어
순화어 대체 작업에도 장벽 남아

토지를 강제수용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인 철도 분야와 관련해 일부 용어를 알기쉽게 순화하는 노력이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철도 분야의 전문 용어를 순화하는 방침을 올 초 행정규칙으로 고시했다.

관행적으로 쓰여 온 불필요한 외래어, 어려운 전문용어, 일본식 한자표현 등을 순화한 것이다. 가령 철도 구조물과 건축제한선 사이의 여유공간을 말하는 ‘구축한계’는 ‘구축 여유공간’으로, ‘신호모진’은 ‘신호위반’으로 고쳤다.

또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주택 업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공모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발코니’를 ‘덧마루’로, ‘팬트리’를 ‘쌈지방’으로 바꾸는 등 국민이 제시한 순화어가 다수 채택됐다. LH는 이러한 순화어에 대해 우리말 관련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공공주택에서 사용되는 외국어 순화 작업에 사용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화된 용어는 단편적인 상식 정도에서 활용성이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국민 재산과 관련이 깊은 전문용어는 여전히 장벽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독 부동산 업계에서는 순화어가 쉽사리 정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토지나 건물을 매입하기 앞서 실물과 주변 입지 등을 둘러보는 활동을 일컫는 ‘임장'(臨場)의 경우, 그 뿌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장의 한자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장소에 임한다’는 뜻이지만, 이 말이 쓰일 당시에는 일본 순사들 사이에서 ‘범죄 현장에 간부급 상관이 방문’하는 경우를 가리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용례는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2017년 경찰청에서 국립국어원의 감수를 받아 일본식 한자어를 다른 말로 대체하면서 사라졌다. 결국 임장은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고 부동산 시장에서만 암호처럼 남아있다.

토지수용과 관련해 널리 쓰이는 ‘재결'(裁決) 역시 임장과 마찬가지로 순화어로 대체됐지만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재결이란 주로 국가기관 등의 행정을 놓고 분쟁이 벌어져 재판을 통해 옳고 그름을 가릴 때 법원이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결이 대체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우리 정부는 1993년 2월 12일 관보에서 ‘행정 용어 순화 편람’을 내고 낯선 행정용어에 대해 대체할 우리말을 소개했는데 당시 ‘재결’ 대신 ‘결정’을 쓰라고 지침을 내린 바 있다. 과거 재결은 경마에서 '심판'을 대신해 종종 사용됐지만 이 역시 2013년 마사회에서 일본식 한자어를 순화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대체됐다.

"법 개정 없으면 순화어 뿌리 못내려"
신조어 나와도 공공정보 반영 안 돼

이처럼 유독 부동산 업계에서 순화어가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실질적 효력을 갖는 법규 등에 옛 전문용어가 버젓이 남은 환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민법 등 관계법령에서 용어가 바뀌지 않자 법적·행정적 효력을 갖는 공문서 역시 여전히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순화어를 배워도 옛 말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왕이면 어려운 말부터 배우기 일쑤다.

가'(假)는 부동산 분야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지난 2005년 국립국어원에서 ‘일본어투 용어 순화 자료집’을 내면서 ‘가등기’, ‘가건물’, ‘가계약’ 등 ‘가’로 시작하는 용어에 여럿 순화어를 제시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가령 가등기에 대한 순화어로 ‘임시 계약’을 제안했지만 가등기가 여전히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외에도 이 자료집은 ‘나대지'(裸垈地) 대신 ‘빈 집터’를 사용할 것도 제안했지만 이 역시 현실에선 쉽사리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전문용어를 순화하는 것은 이런 언어를 문서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문적 종사자들이 순화어를 사용하도록 공공이나 민간에서 노력이 수반돼야 민간에도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며 “부동산 공인중개사 시험 문제나 관련 교재에서 모든 용어를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법률용어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법 개정 역시 국회 문턱을 순탄하게 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19년에는 황주홍 당시 민주평화당 의원이 ‘가지정’을 ‘임시지정’으로 순화하는 내용의 ‘건축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토지수용 등 중요 제도와 관련해 쟁점이 되는 용어는 공공이 제공하는 정보에서 오히려 빠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11년 당시 국토해양부가 선보인 ‘토지이용 용어사전’이 공공 데이터로 풀려 현재 LX한국국토정보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매년 새롭게 업데이트 되는데 ‘비례율’, ‘권리가액’ 등 법령에는 없지만 업계에서 재건축·재개발 등 개발사업에 널리 쓰이는 새로운 용어를 수록하지 않고 있다.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공공 데이터 ‘서울시 도시계획 용어설명’ 역시 이 같은 용어는 제외됐다.

LX 관계자는 “해당 데이터는 주로 관계 법령에 실린 용어의 정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내용으로, 대학 전공자나 시행사 등 업계 관계자들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며 “민간에서 사용되는 신조어 등에 대해서는 아직 수록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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