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영향으로 11월 12~15일 열린 2020년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대회였다. 사진은 타이거 우즈가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코로나19 영향으로 11월 12~15일 열린 2020년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대회였다. 사진은 타이거 우즈가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멋진 가을 풍광 즐기고 오셨겠네요?”
“가을 풍광이요?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옵디다.”
“가을 야생화에다 단풍이 절정이었을 텐데요.”
“계절이야 그렇겠지만 라운드하느라 한눈팔 여유가 있어야지요.”

“그럴 리가요. 평소 실력대로 치시고 주변의 가을 경치 흠뻑 즐기실 좋은 기회인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이번 나들이에서 딱 두 번 단풍을 본 것 같습디다. 골프장 입구 들어설 때와 골프장 나설 때. 골프장을 나설 때야 ‘아, 우리가 저 천국 같은 곳에서 노닐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제야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11월 어느 날 라운드를 다녀온 지인과의 대화 내용이다.

 

봄가을이면 버릇처럼 라운드를 다녀온 지인들에게 골프코스의 풍광을 즐겼느냐고 묻곤 한다. 계절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라운드를 즐겼다는 분은 10명에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공 쫓아다니느라 경치 감상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졸면 죽는데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골프장에선 골프에 집중해야지 딴짓하다간 지갑 다 털린다니까요.” 
지인들에게서 듣게 되는 답변들이다.

 

골프처럼 집중과 몰입을 요구하는 스포츠도 드물다.
미국의 골프영웅 벤 호건(1912~1997, 메이저 9승 포함 PGA투어 통산 63승)은 골프의 집중도를 얘기할 때 단골로 인용되는 골퍼다. 골프 사가들은 호건을 골프 자체는 물론 불굴의 투혼과 무아지경으로 골프에 몰입하는 자세 등으로 골퍼들이 본받아야 할 전범으로 평가하고 있다. 

1954년 마스터스대회 때의 일. 호건이 결정적인 퍼트를 하려는 순간 그의 다리 사이로 개가 지나갔다. 그러나 호건은 개의치 않고 퍼트를 해 홀인에 성공했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이 물었다.
“개가 퍼트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까?”
“무슨 개?”
호건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의 파3 12번 홀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홀로 정평이 나 있다. 1948년도 마스터스 챔피언인 클로드 하먼과 1951년 1953년도 챔피언 벤 호건이 함께 라운드하는 중이었다. 하먼이 먼저 쳐서 홀인원, 갤러리를 열광시켰다. 다음에 친 호건은 버디를 기록했다.

13번 홀을 향해 걸어가며 벤 호건이 입을 열었다.
“클로드, 나는 오거스타 12번 홀에서 버디를 처음 해본 것 같아. 자네는 뭐 했나?”
“아, 나 홀인원 했잖아!”
“아 그랬어? 참 잘했네, 축하하네!”
벤 호건은 자기 골프에 집중하느라 완전히 삼매경에 빠져 함께 치는 사람이 홀인원을 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1920년 브리티시 여자선수권 결승전에서 19세의 조이스 웨더렛(1901~1997)이 보인 집중력은 두고두고 골프 사가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상대는 브리티시 여자선수권 4연승을 달성한 무적의 여왕 세실 리치(1891~1977). 하루에 두 라운드를 도는 결승전이었는데 오전 라운드에서 리치가 6홀을 이긴 상태. 누구도 리치의 5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라운드에서 웨더렛이 맹추격, 드디어 15번 홀에서 올 스퀘어가 되었다.

 

17번 홀에서 웨더렛이 5m 퍼팅을 넣기 위해 어드레스를 취한 순간, 그린에서 50m 떨어진 철로로 열차가 요란하게 돌진했다. 갤러리들은 당연히 웨더렛이 열차가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어드레스를 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열차의 굉음이 그린을 울리고 있는 그 순간 퍼터를 떠난 볼은 그린 위를 구르더니 홀 속으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이다. 첫 출장으로 최고의 타이틀을 차지한 웨더렛의 충격적인 데뷔전이었다.

기자회견에서 17번 홀의 퍼트에 대해 질문이 쏟아졌다.
“열차가 지나가는데 왜 다시 어드레스를 하지 않았죠?”
“왠지 모르겠어요.”
“그때 급행열차가 지나갔지 않습니까. 그 경우 대부분 어드레스를 중지하고…”
“설마? 저는 몰랐습니다.”

 

가을 풍광이 느껴지는 2022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최종전 'LG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마지막 날 모습이다. 사진제공=KPGA
가을 풍광이 느껴지는 2022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최종전 'LG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마지막 날 모습이다. 사진제공=KPGA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의 손자로, 옥스퍼드대학을 나와 골프가 좋아 평생 주옥같은 골프 관련 글을 써온 버나드 다윈은 훗날 ‘조이스 웨더렛과의 산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정말 급행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누구든지 퍼트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조이스 웨더렛이다.”

조이스 웨더렛은 28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9년간 전 영국을 포함한 유럽선수권대회에서 38번 우승했다. 그가 패한 것은 두 번뿐이라 사상 최강의 아마추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뉴턴 웨더렛은 ‘완전한 골퍼(Perfect Golfer)’라는 명저를 남겼다.

 

우승을 목표로 하는 프로선수들에게 집중 혹은 몰입은 최고의 덕목이다. 그러나 집중이 중요하지만 늘 집중할 수는 없다. 특히 한 달에 두어 번 필드를 찾는 주말 골퍼들에게 선수들과 비슷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프로선수들도 항상 집중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연습으로 기계적인 샷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인 순간 심사숙고하고 집중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농담도 하며 긴장을 푼다. 

 

ⓒ연합뉴스 가을 풍광이 느껴지는 2022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최종전 'LG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마지막 날 챔피언조가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KPGA
ⓒ연합뉴스 가을 풍광이 느껴지는 2022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최종전 'LG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마지막 날 챔피언조가 경기하는 모습이다. 사진제공=KPGA

 

 

실제로 늘 집중해야 하는 사람의 집중도가 오히려 더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의 아더 F. 크레이머 교수(심리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항공관제사나 비행기 조종사처럼 시선과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사람들도 비행과 무관한 예상치 못한 물체가 시야에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시선이 계기판을 벗어나 물체를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공관제사와 조종사에게 컴퓨터 스크린의 도형과 문자 등을 유심히 관찰하도록 한 뒤 예정에 없는 도형 등을 순간적으로 제시한 결과 대상자의 반 이상이 임무와 관계없는 도형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시선을 그 물체에 빼앗겼으며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 물체에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결과는 몰입이나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주말골퍼들에게 라운드 내내 집중과 몰입을 요구하는 것은 라운드를 망칠 가능성이 더 크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지’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한눈팔지 말아야지’ ‘헤드업 하지 말아야지’ ‘내 샷에만 집중해야지’ ‘오늘은 신기록 달성해야지’ 등등의 온갖 주문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샷을 방해하고 리듬을 잃게 만든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올 까닭이 없다. 

연습장에선 신중하게 연습하지만 필드에선 마음 비우고 라운드를 즐기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의외로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있다. 바로 ‘허심적타(虛心適打)’의 진리다.
때때로 집중과 몰입에서 해방되어 골프코스의 풍광을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자. 이때 비로소 골프의 본모습과 만날 수 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email protected])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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