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피오트르 안데스셰프스키가 풍월당에서 쇼케이스를 마친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안데스셰프스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살짝 연주까지 해줬다. ⓒ풍월당 제공
피아니스트 피오트르 안데스셰프스키가 풍월당에서 쇼케이스를 마친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안데스셰프스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살짝 연주까지 해줬다. ⓒ풍월당 제공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이름 먼저 바로잡는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피오트르 안데스셰프스키(Piotr Anderszewski)는 오랫동안 언론 등에서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라고 표기했다. 표트르라는 이름 때문에 러시아 사람으로 자주 오해받았다. 본인이 해준 발음과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르면 ‘피오트르 안데르셰프스키’가 맞다. 그래서 지금부터 피오트르 안데르세프스키로 적는다.

그는 지난 2월 2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전날(27일)은 풍월당에서 쇼케이스 시간을 따로 마련했다. 강남 도산대로에 있는 풍월당은 음악을 통해 감동·기쁨·위안을 주는 공간이다. 음반과 서적을 판매하고, 수시로 다양한 강좌를 오픈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좋아하고, 리히테르와 아바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성지(聖地)같은 곳이다. 더욱이 월드 클래스 피아니스트가 내일 독주회를 앞두고 팬들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분위기는 핫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라는 뜻이다.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꽁꽁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 실력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뾰족함은 기어코 비집고 나온다. 안데르셰프스키가 그랬다. 매장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둘러보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마침 풍월당에서 기획한 편집앨범 ‘클래식을 듣는 당신에게’에 수록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첫 곡은 에드바르드 그리그가 작곡한 ‘서정 소품집 10권(Op.71)’에 나오는 7번 ‘추억(Remembrances)’이었다. 그는 자리에 서서 옴짝달싹 않고 피아노 소리에 집중했다. 귀에 익숙한 노래라는 듯 살짝 흥얼거리기도 했다. 다만 누구 연주인지는 궁금해 하는 표정. 그래서 에밀 길렐스라고 알려줬다. 이어 나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2번(BWV813)’ 중 첫 번째 곡인 ‘알망드(Allemande)’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였는데 역시 ‘얼음’이었다. 레전드의 품격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살짝 연주까지 해줬다. 통역과 진행을 맡은 정주영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피오트르 안데스셰프스키가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앉는 의자 두개를 겹쳐 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오트르 안데스셰프스키가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앉는 의자 두개를 겹쳐 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다음날 리사이틀도 엑설런트였다. 피날레로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몸은 있지만 영혼은 없었을 것’이라고 쇼케이스에서 말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골랐다. 악성의 마지막 소나타 3곡(30·31·32번) 중 31번(Op.110)을 들려줬다. 원곡의 형식을 살짝 비틀었다. 악장과 악장 사이를 쉬지 않고 연속해서 논스톱으로 연주하는 아타카(Attacca) 방식으로 선보인 것.

이에 앞서 안데르셰프스키는 ‘베베른 변주곡(Op.27)’을 터치했다. 사연 많은 곡이다. 1990년 영국 리즈 콩쿠르 준결승에서 갑자기 피아노를 멈추고 무대를 내려 왔다. 나중에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연주를 계속 진행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땅속에 있는 안톤 베베른도 박수를 쳤으리라. 이것도 악장을 쉬지 않고 한묶음으로 연결했다. 결국 베베른과 베토벤 6개 악장을 하나로 이어 연주했다. ‘발췌’와 ‘구성’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각색형 피아니스트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여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피아노 앞에 있는 ‘범상치 않은 의자’도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으로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등받이가 없는 피아노용 전용의자를 쓰는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쓰는 등받이가 있는 일반용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살짝 낮아서 두개를 겹쳤다. 예전의 글렌 굴드가 생각났다. 공연 기획사에 왜 이런 의자를 사용했는지 물었더니 연주자가 요구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2021년 공연 때엔 피아노용 의자에 앉았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가 예술의전당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블레하츠는 김봄소리의 연주에 반해 먼저 이메일을 보내 같이 공연하고 싶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츠가 예술의전당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블레하츠는 김봄소리의 연주에 반해 먼저 이메일을 보내 같이 공연하고 싶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 제공

폴란드 피아니스트들은 무엇인가 특별하다. 엄청난 한방을 가지고 있다. 라파우 블레하츠(Rafal Blechacz)는 15회 쇼팽 콩쿠르(2005년) 우승자다. 세계 곳곳의 러브콜을 받으며 10년 정도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던 그는 2016년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그해 모든 스케줄을 비우고 대학에서 철학 박사 논문을 쓴 것. “고교 시절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즐겨 읽었다. 철학 공부가 음악 해석의 자유와 한계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논문을 썼다”고 밝혔다. 아 거장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2016년 폴란드에서 열린 비에냐프스키 콩쿠르를 보다가 2위에 입상한 김봄소리의 연주를 들었다. “마법 같은 음악적 분위기와 다채로운 색채를 빚어내는 김봄소리의 능력과 이해력에 매료됐다”고 고백했다. 즉시 ‘제 이름은 블레하츠고 피아니스트입니다’로 시작하는 자기소개 이메일을 보냈다. 김봄소리도 처음엔 ‘가짜 메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협업은 2019년 드뷔시와 포레, 폴란드 작곡가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담은 음반 녹음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의 찐우정은 지난 2월 22일 예술의전당 듀오 리사이틀로 계속 진행됐다.

“그가 연주했던 피아노라도 찍자.” 지난해 3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끝난 뒤 관객들이 무대 위 지메르만이 연주했던 피아노를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민병무 기자
“그가 연주했던 피아노라도 찍자.” 지난해 3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끝난 뒤 관객들이 무대 위 지메르만이 연주했던 피아노를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민병무 기자

1975년 쇼팽 콩쿠르에서 열여덟 살의 나이로 우승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짐머만으로 적기도 하지만 그도 역시 자신의 이름을 ‘지메르만’으로 불러달랐고 이야기했다.  

지난해 3월 2일 롯데콘서트홀 독주회는 두고두고 화제였다. 공연을 촬영하는 2층 객석 난간의 카메라를 검은 천으로 덮었다. 무대 천장에 길게 매달린 마이크도 아예 치웠다. “어제 세 번의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공연이 중단되지 않을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휴대폰이 아닌,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공연을 담아 주십시오.” 공연기획사는 음악회를 망칠까봐 1부와 2부가 시작되기 전 일반 안내방송에 이어 따로 이런 주의 멘트를 내보냈다.

어디 이뿐인가. 입구 곳곳에 ‘연주자의 등장과 퇴장, 커튼콜, 앙코르 등 공연 전체를 통틀어 그 어떤 사진 및 영상 촬영도 금지되며 적발 땐 공연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휴대폰 전원을 꼭 꺼주세요’라는 간곡한 요청도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역시 지메르만이었다. 까탈스러운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준 값을 톡톡히 했다. 연주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퍼펙트 피아노맨은 신공을 발휘해 폭풍 감동을 안겨줬다. 하이라이트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 도대체 88개의 건반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마지막 음을 누른 뒤에도 소리는 한참 공간을 맴돌더니 점점 가슴으로 들어왔다. 황홀한 30초였다. ‘잔향(殘響)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게 해줬다.

김성태 IBK기업은행장이 취임 후 첫 번째 글로벌 사업으로 폴란드 사무소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폴란드는 최근 전기차 배터리 생산 허브로 부상하고 있는 요충지다. 국내 전기차 배터리 3사인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을 비롯해 관련 협력사들이 진출해 있다. 기업은행은 상반기 중 사무소를 개소해 원활한 금융지원과 현지정착 등을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클래식 음악이 결합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현지 폴란드인과 비즈니스 미팅을 한다. 기업은행 직원이 말한다. “한국에서 안데르셰프스키 공연을 봤어요. 피아노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요. 환상적이었어요.” “오늘도 이곳에 오면서 비에냐프스키와 시마노프스키의 곡을 들었어요. 너무 너무 좋아요.” 이쯤되면 승률 100%다. 쇼팽의 나라로 가는 기업은행에 브라보 박수를 보낸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