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CEO 잇단 방중 러시 이어 유럽 반도체는 중국 투자… 美, 삼성·SK엔 반도체 압박

[주간한국 박철응 기자] "미국의 대중(對中) 봉쇄 정책은 마치 과거에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지난 대선을 앞둔 2021년 '미-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이라는 논문에 쓴 내용이다. 그는 이어 "이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당히 잘 지내면서 모호한 외교를 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진단했다. 안보의 제약 요인 중 하나로는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이 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돼 있으며, 이와 직간접적으로 결부된 좌파 세력이 맹목적인 자주외교와 민족주의 노선을 증폭시켜 왔다"고 주장했다. 극단적 색깔론이 엿보인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6월 8일 저녁 서울 성북구 중국대사관저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6월 8일 저녁 서울 성북구 중국대사관저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대선 이후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안보 분과 인수위원을 거쳐 국가안보실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3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의 사퇴 이후에는 김 차장이 한국 외교 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미국 편중 시각이 그대로 외교 방향에 반영되고 있다.  

中 대사 "韓 잘못된 판단"
尹, 양안 관계 직격…미국은 '우회'

한중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서울 성북구 중국대사관저로 초청한 자리에서 "중국 정부는 항상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지만, 현재 관계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혀 가슴이 아프다"며 "솔직히 그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한 관계는 외부 요소의 도전에도 직면했다.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 일각에선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데 베팅을 하고 있다"며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자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던 김 차장의 전망과 달리 최근 미국은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위험 제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요 국가 지도자들과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들은 잇따라 중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지난 6일에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수주 내에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경제 활동 재개(리오프닝)에 나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실익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가치 동맹'만을 강조하며 갈라파고스섬처럼 이 같은 흐름과 떨어져 있으며,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의 위기감은 더욱 깊어져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 방문을 앞두고 외신 인터뷰에서 대만 해협 갈등과 관련 "힘에 의한 현상 변경에 절대 반대한다"고 밝힌 것은 결정적 장면이었다.

당장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며 "대만 문제는 순전히 중국의 내정이며, 중국의 핵심 이익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반발했다. "타인의 말참견을 용납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에 한국 외교부는 "중국의 국격을 의심하게 하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라고 맞받아치면서 최근 수년간 전례없는 한중 외교 설전으로 이어졌다. 

정작 한미 정상의 공동성명에는 대만 해협과 관련해 '불법적인 해상 영유권 주장, 매립 지역의 군사화 및 강압적 행위를 포함하여 인도-태평양에서의 그 어떤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하였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윤 대통령이 말한 '힘에 의한'이란 표현은 없었고, '인도-태평양'이라는 포괄적 지역을 대상으로 했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 통일 시도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어 지난달 주요 7개국(G7) 정상 공동성명 역시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우리는 중국과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 준비가 돼 있다"며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역할이나 경제 규모를 고려했을 때 공통의 이익이나 세계적 도전에서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G7 정상회담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아주 조만간 해빙되기 시작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CNN 방송에 출연해 미국은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추진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디커플링이 공급망 재편으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라면, 디리스킹은 중국발 위험 요인을 없애겠다는 낮은 강도의 압박을 의미한다.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中 교역액 늘고 성장률 전망 상향

신냉전으로 격화되는 흐름에 먼저 제동을 건 것은 유럽연합(EU)이다. 지난 3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중국으로부터 디커플링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들어맞지도 않는다"며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며 "최악은 우리 유럽인들이 그저 추종자일 뿐이라고 생각해 미국의 의제나 중국의 과잉 대응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 매체는 지난 5일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와 라스 클링바일 독일 집권 사회민주당 대표의 베이징 회동에 대해 "디커플링은 독일·중국 관계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클링바일 대표의 발언을 강조했다. 미국보다 더 긴밀하게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는 EU 회원국들의 속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는 서방 국가들의 단일한 대응이라는 구도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며, 최근 달라진 톤은 이를 반영한 변화로 읽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 해관총서(관세청) 자료상 올해 1~5월 수출입 총액은 16조 7700억위안(약 3060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 증가했다. 무역 흑자는 2조 4700억위안으로 38% 늘었다. 지역별로 보면 EU와의 무역액은 2조 2800억위안으로 3.6% 증가해 전체 무역액의 13.6%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과는 1조 8900억위안으로 5.5% 줄어들어 11.3%의 비중을 보였다. 일본과의 무역액 역시 3.5% 줄어들어 전체 무역액의 5.4% 규모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7일(현지시간)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5.4%로 예상했다. 지난 3월의 5.3%에 비해 상향 조정한 것이다. 세계은행은 지난 1월 중국 성장률 전망을 4.3%로 제시했는데 지난 6일에는 5.6%로 크게 높였다.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에 따른 경제 활동 정상화가 국내 서비스 분야를 필두로 한 소비 지출을 견인할 것이란 분석이다. 

세계 최대 '공장'이자 '시장'인 중국과 멀어질수록 경제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시기에 윤 대통령은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며 '뒤늦은 선봉장'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유럽 외에서도 미중 갈등에 빠져들지 않고 실익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월에 실용 중립 노선을 지키는 25개 국가를 묶어 'T25'(트랜젝셔널(transactional) 25)라고 이름 붙였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핵심인 인도와 남미의 대국 브라질, 중동 내 미국 거점으로 꼽혀온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포함됐다. 이스라엘 역시 T25로 분류될 정도다. 세계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국가들이 초강대국 사이의 대결에 동참하지 않고 등거리 외교를 지향하면서 국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더 적극적이다. 지난 8일 유럽 2위의 스위스·이탈리아 반도체 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는 중국 산안광뎬(三安光電)과 함께 충칭에 32억달러(약 4조 19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합작 벤처 설립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전기차 부품 반도체 생산을 지원하는 것으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규제하는 가운데 오히려 관계 강화에 나서는 것이라 주목받고 있다. 

진 마크 체리 STM CEO는 "핵심 현지 파트너와 전용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만드는 것은 중국 고객들의 늘어나는 수요에 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는 지난달 말 중국을 방문해 정부 고위 관리 등을 만난 자리에서 디커플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애플과 인텔, JP모건, 스타벅스, GM 등의 CEO들도 잇따라 중국을 찾았다. 최근 인공지능(AI) 붐의 중심인 미국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와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도 조만간 중극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올해 초 이탈리아 명품 구찌의 모기업인 케링그룹 CEO가 중국을 찾은 바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 명품 시장이다. 또 미국의 거대 석유 기업인 엑손 모빌은 중국 광동성 일대에서 대규모 석유화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경영진이 올해 여러 차례 현지를 찾았다. 

ⓒ연합뉴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연합뉴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美 "'마이크론 공백' 韓 수혜 안된다"
유승민 "대한민국 호구 취급"  지적

미국 정부와 의회는 이 같은 기업인들의 방중 러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 기업들에게 중국과의 교역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디리스킹은 반도체와 2차전지 등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곧 한국의 핵심 산업이다. 

중국은 지난달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의 제품에서 심각한 보안 문제가 발견돼 제품 구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고성능 반도체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미국의 조치와 G7 성명에 대한 보복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강으로 꼽힌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전체 매출의 16%를 중국 시장에서 거뒀으며, 이는 곧 한국 기업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른바 '마이크론 공백'이다. 

그러자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이 마이크론의 공백을 메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며, 미국 정부도 동맹국들과 함께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 제재 이후 중국 판매를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이다.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과 마이크 갤러거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지난 2일(현지시간)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에 보낸 서한에서 "마이크론이 중국의 부당한 보이콧으로 잃은 매출을 가져가 마이크론을 약화하지 않도록 신속히 일본과 한국 정부와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기업들이 마이크론의 시장 점유율을 대체하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이들 기업에 반도체법(CHIPS Act) 규정 이행과 중국을 겨냥한 특정 수출통제에서 예외를 주는 것은 중국 정부에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우리와 한국의 긴밀한 동맹을 약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정부가 (기업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고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며 "기본적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사업을 하니 양쪽을 감안해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여권 일각에서도 우려를 내놓고 있다. 유승민 전 미래통합당(옛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4일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들(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마음대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면서 우리 기업들은 구속하려 든다"며 "이건 '글로벌 내로남불'이다. 위선적인 이중잣대다. 대한민국을 호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미중 사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면 우리 경제는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미국에게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이나 빨리 고쳐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처럼 '중국과 경제할 자유'를 당당하게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의원은 경제학 박사로 과거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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