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사진=AFP 연합뉴스 제공)
공화당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사진=AFP 연합뉴스 제공)

부통령에 이어 미국 대통령 승계 서열 2위인 하원의장이 낙마했다. 미국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단 8명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반란이 벌어낸 참사라는 평이다.

미국 정가가 혼란에 빠지며 경제에도 여파가 예상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과 여당인 민주당은 느긋한 모습이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내년 미국 대선에 희망이 생겼다는 판단에서다.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의 등장과 추락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했다. 매카시는 하원 원내대표로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지난 1월 하원 개원 당시 매카시가 당연히 의장직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며 무려 15번의 표결 후 겨우 의장이 됐다. 미국 하원의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한 번에 끝나지 않은 것은 1923년 이후 100년 만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에 대한 탄핵에서 반기를 들었던 매카시의 힘을 빼려했다.

이미 상처받은 리더십은 더욱 어이없는 방식으로 힘을 잃었다. 매카시가 의장직에 오른지 겨우 9개월 만이다. 이번에도 8명의 공화당 의원이 문제였다. 전격적으로 발의된 매카시 의장에 대한 해임안 투표 결과는 찬성 216표, 반대 210표. 민주당은 전원이 찬성했고 여기에 8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동참했다. 8명의 반발은 이미 예상됐고 '키'를 쥔 민주당은 매카시 해임을 사실상 결정했다.

8명의 강경파 의원들은 협치를 통한 국가 이익보다는 혼란을 노렸다. 이번 해임안의 발단이 매카시 의장과 민주당 측이 예산 회기 종료로 인한 정부 셧다운을 막기 위한 합의였다는 점은 이런 현실을 대변한다.

강경파 의원들은 연초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부채한도 증액에 대해서도 협조를 거부하는 등 돌발 행동을 이어왔다. 미국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 사실상 트럼프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했던 것이다.

미국 정가에서는 트럼프 진영이 눈엣가시 같던 존재를 낙마시키려 한 돌발 행동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임시 예산안이 처리된 후 이번 해임안을 전격 발의했던 매트 게이츠 의원은 지역구가 플로리다주다. 트럼프의 근거지인 플로리아에서 다음 주지사직을 노리고 있던 인사다. 당연히 트럼프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는 지난해 하원의장 선출 투표에서 트럼프에 표를 던지는 등 정상적인 정치인으로 보기 힘든 행보를 이어 왔다.

CNN방송은 매카시가 트럼프의 극단적인 공화당 혁명의 희생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행보도 트럼프가 조장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가 정부 셧다운을 유도하려던 상황에서 매카시가 협치를 위한 돌발행동을 벌이자 강경파를 동원해 응징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트럼프 진영과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승리라고 의기양양하지만 실상은 다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진정한 승자는 민주당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매카시 의장도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임시 예산안 협상에 협조한 인물이다. 민주당도 후임 의장에 매카시보다 더욱 보수성향인 인사가 앉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민주당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매카시를 지지하면 해임을 막을 수 있었다. 결국 민주당도 매카시의 해임을 반겼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미국 정가의 관심은 온통 내년 대선에 쏠려 있다. 따지고 보면 최근의 상황은 공화당, 트럼프보다는 민주당과 바이든에게 불리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에 밀리고 있다. 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은 부인이 연루된 부패 이슈에 연루되면서 당에 먹칠을 했다. 미국 외교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상원 외교위원장이 해외 인사와 연루된 부정부패에 연관됐다는 소식은 바이든 정부에 큰 부담이었다.

노조와 바이든 대통령의 갈등도 심각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에는 디트로이트까지 날아가 자동차 제너럴모터스의 노조 파업 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이 노조 파업 행사에서 목소리를 낸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자신이 주도한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 자동차 공장에서 대규모 실업 우려가 커지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대응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음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유력한 트럼프와 맞서기 위해서는 노조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민주당에 부정적인 이슈들은 매카시 해임을 계기로 언론에서 사라졌다. 민주당으로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더 큰 성과도 있다. 공화당의 분열과 유권자들의 피로감이다.

8명의 강경파를 제외한 공화당 소속 의원 전원은 매카시를 지지했다. 당내의 절대다수는 강경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은 의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2020년 대선에서도 적지 않은 공화당 유권자들이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트럼프가 싫다며 바이든에게 투표한 바 있다. 바이든의 경제 실정에 대한 불만이 쌓이며 공화당 지지 세력이 집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불거진 돌발 행동은 정상적인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다시금 트럼프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줄 수 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강경파의 급부상은 공화당의 선거 자금 확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유권자들이 지지하는 매카시를 중심으로 한 중도 진영이 주도하는 선거자금 모금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트럼프의 충격요법이 오히려 공화당은 물론 트럼프 자신마저 옥죌 수 있다는 판단이다.

트럼프 진영의 8명 의원은 보수를 팔아먹은 8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벌써 내년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시 민주당에 주도권을 넘겨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 평론가 스티븐 콜린슨은 "매카시의 낙마는 트럼프 시대의 공화당이 어떻게 미국과 전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한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세력에 의한 정치적 암살은 민주당에 대한 선물"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고민거리도 있다. 정부 셧다운을 막은 임시 예산안은 한 달 뒤면 효력을 잃는다. 매카시에 비해 강경파 인사가 새로운 의장이 될 경우 예산 협상은 난항을 겪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민주당은 공화당의 책임론을 펼 것이 자명하다. 민주당은 챙길 것을 다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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