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변호사. (사진=AP 연합뉴스 제공)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변호사. (사진=AP 연합뉴스 제공)

미국 대선에 제3의 후보는 종종 등장했다. 이번은 다르다. 누구나 인정하는 미국 정가 최고 명문가인 ‘케네디’라는 이름이 내년 대선 투표용지에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케네디 가문의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변호사다. 그가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후 적잖은 파장이 일고 있다. 그가 선대에서 대대로 속했던 민주당이 아니라 무소속을 택한 것도 충격적이지만 의외로 민주당은 표정을 관리하는 모습이다. 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가 기대되는 탓이다.

케네디 변호사는 아버지가 한때 법무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F.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다. 큰아버지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다. 주일 대사를 지낸 캐럴라인 케네디가 고모다. 이쯤 되면 미국 정가의 ‘금수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가 개설한 홈페이지도 케네디가 인사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현실 미국 정치에 지친 유권자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겠다는 노골적인 선거전략이다.

케네디 변호사가 민주당과 공화당이 아닌 무소속을 택하자 더욱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가족들은 대부분 민주당 소속이지만 그는 공화당적인 성향도 보여왔다. 출마 선언 장소도 미국 독립의 상징인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독립기념관인 ‘헌법기념관’이었다.

독립 기념관에서, 전 대통령의 조카가 거대 양당 소속이 아닌 독립 후보로 나서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유권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이벤트였다.

그의 대선 행보는 이미 시작됐다. 출마 선언을 한 필라델피아는 펜실베이니아주 도시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지역이다. 지난 대선이나 다음 대선을 앞두고 조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유세에 화력을 집중했거나 이미 진행 중인 곳이다.

그의 튀는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출마 선언 당일에는 폭스뉴스 기고를 통해 왜 자신이 민주당을 나와 독립후보로 대선에 나섰는지를 밝혔다.

폭스뉴스는 대표적인 친트럼프 성향을 보이는 보수 매체이다. 민주당 소속 인사였다면 자연스럽게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를 택했겠지만, 그의 시선은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향한 셈이다. 그의 공격 대상이 바이든보다는 트럼프에 가까울 수 있다는 예상을 해 볼 수 있다.

케네디 변호사와 민주당과의 관계는 악연이다. 그는 이미 지난 4월 민주당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포기한 바 있다. 그런데 6개월 만에 무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은 그 사이 미국 정가의 흐름에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는 민주당에도 거센 비판을 퍼붓고 있다. 공화당보다 민주당과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비난수위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가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나 피트 부티지지 현 교통부 장관 대신 바이든을 후보로 만들기 위해 막후에서 움직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을 억눌렀다는 것이다.

케네디 변호사의 발언들은 어찌 보면 트럼프의 발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공격적이고 보수적이다. 오랜 기간 백신 접종 반대 운동을 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백신에도 반대했다. 백신 접종을 적극 권장한 민주당과는 결이 맞지 않는다. 

그는 출마 선언을 하며 빅테크, 제약회사, 월가, 대형농장, 대형 군수업체,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는 이들 분야에 대한 경계심을 기반으로 미국이 전 세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세력으로부터 정부가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의 공약을 연상케 한다. 고립주의, 무역규제는 공화당의 정책이 아니지만 트럼프는 이를 관철했다.

이런 그의 행보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진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과도 대비된다. 그런데도 그의 선거 슬로건은 “나는 케네디 미국인이다"이다. 케네디가의 후광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케네디라는 이름이 곧 표와 연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케네디가는 그의 출마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당장 그의 형제들이 들고 일어났다. 영화감독인 로리 케네디, 조 케네디 2세 전 하원의원, 케슬린 케네디 전 메릴랜드 부대사, 케리 케네디 등은 케네디 변호사의 미 대선 출마가 미국에 위험한 일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로버트는 우리 아버지와 이름이 같지만, 가치관, 비전, 판단력은 다르다. 오늘의 발표는 우리에게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케네디의 이름은 얻었지만 정작 케네디가의 지지는 받지 못했다.

케네디 변호사는 오히려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극우 유튜버 등 트럼프 측에 친숙한 이들과 교류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오히려 민주당보다는 그의 출마가 트럼프 진영에 악영향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발표된 USA투데이- 서포크 대학 여론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7%가 바이든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각각 37%의 지지율을 나눠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13%의 지지를 받았다. 갓 출마 선언을 한 후보로서는 이례적인 성과다.

이 결과를 보며 공화당이 당황해 하고 있다. 케네디의 등장에 반응하는 이들이 진보가 아닌 중도 보수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캠프 출신인 브라이언 세이치크 공화당 전략가는 “케네디가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더 어필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표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바이든만 아니면 된다는 일부 민주당 유권자들의 이탈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는 이미 케네디를 진보가 아닌 보수 정당의 인사로 인식하고 있어 보수 진영의 표를 분산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트럼프가 바이든 대통령과의 양자 대결 투표에서 앞서고 있지만 케네디가 대선을 완주할 경우 트럼프에 지친 보수 세력들이 이탈해 오히려 바이든이 득을 볼 수도 있다.

제3의 무소속 후보가 미국 대선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로스 페로가 출마한 1992년 대선이다. 페로는 당시 18.9%를 득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는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분열하는 계기였고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은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던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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