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주도가 아닌 높은 시민의식 바탕으로 활동폭 넓혀…"민간과 공공의 관심 필요"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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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우리 사회의 국어 순화 활동은 일반 국민이 편하게 소통하기 위한 '한글의 권리'를 살찌우는 원동력이었다. 우리말 순화 활동은 초기에는 정부가 주도해 하향식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하지만 시민의식이 발전하면서 시민단체 등 민간이 자발적으로 순화어를 만들고 홍보하는 상향식 순화 활동이 주류로 부상했다. 그 과정에서 공공언어의 한글화 운동을 주도했던 국어문화원연합회와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문제의식과 노력이 뒤따랐다. 

민관 합동의 '우리말 가꾸기' 운동 
순화어 제정 후 다양한 홍보 뒷받침

초기 우리말 순화 활동은 일본어 잔재를 없애는 정부 산하기관의 활동이 중심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1월 미 군정청 산하에 설치된 ‘국어정화위원회’가 언어순화를 추진했고 이어 1948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소책자인 ‘우리말 도로찾기’를 간행한 게 그 시작이었다. 2004년 이후 국어 순화 정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하고 소속기관인 국립국어원이 구체적인 연구와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2004년은 우리말 순화 활동에 민간 참여가 두드러진 시점이었다.

국립국어원은 2004년 외국어·외래어 가운데 순화 대상을 선정하고, 연구 대상인 권장 순화어 61개를 선정했다. 이 순화어 61개는 일반 국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쌍방향적인 순화 방식으로 진행, 전문가 중심이었던 이전의 일방적인 순화 방식을 벗어난 게 특징이다. 당시 국립국어원은 ‘우리말 다듬기’라는 누리집을 열고 이를 통해 접수된 국민 의견을 종합해 순화어를 선정했다.

그러나 우리말 다듬기를 통한 활동은 단순히 새말 지정에 그친 우리말 순화 활동의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순화어 61개는 대부분 국민 소통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순화 활동의 핵심은 국민들이 새로운 말을 편하게 느끼고 자주 사용하는 것이지만 대부분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순화어 61개 가운데 11개는 같은 의미의 외래어 표현이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는 등 정착한 상태라 국민들이 대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또한 순화어 선정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이 때문에 우리말 순화활동에서 홍보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한글 연구단체와 시민단체 등은 자체적인 순화어 지정 활동과 새 말을 알리는 캠페인에 힘을 기울였다.

가령 사단법인 국어문화원연합회는 문체부와 함께 ‘우리말 가꿈이’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우리말 가꿈이는 지역 국어문화 홍보 동아리로, 지역민의 국어 생활을 돕고 올바른 국어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전국 12개 지역 국어문화원에서 동아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는 문체부 등 지원을 받아 누리집인 ‘쉬운 우리말을 쓰자’를 운영 중이다. 이 누리집에 중앙 행정부 47개 부처청위원회와 17개 광역 지자체의 보도자료, 신문과 방송 보도에 자주 나오는 외국어 용어 3500여 개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이용자가 궁금한 외국어를 검색하면 이에 대응해 바꿔 쓸 쉬운 우리말과 3개 이상의 바꿔 쓴 용례, 원어 정보, 국민 인식 조사 결과 등이 제시돼 참고할 수 있다.

한글문화연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와 언론 보도를 검토하고 외국어 표현을 검토한 후 순화어를 만들어 개선 요청을 제기하고 있다.

헌법 전문 한글화 개헌은 과제  
"언론 등 미디어의 역할과 관심 필요" 

이처럼 시민단체 등 민간의 순화 활동 필요성을 공감한 정부와 공공기관 등이 호응하면서 자체적으로 순화어 홍보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울시 등 다수의 지자체는 공문에 쓰이는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활동을 개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또 공기업에서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건설업계에서 주로 사용돼온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해 관련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철도 용어의 경우 국토교통부가 일본식 표현을 순화하고 한국철도공사, 국가철도공단, 서울교통공사 등이 순화어를 주제로 퀴즈 등 홍보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은 고운 우리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제언에도 힘을 쓰고 있다.

지난해 부산에서 엑스포 유치시 외국인 유입 증가 등을 염두에 둔 영어상용화정책이 추진되자 34개 부산 시민사회단체들과 76개 국어단체들이 공동기자회견을 여는 등 반대 활동을 전개해 일부 정책을 수정했다.

최근에는 인천시가 지난달 16일 송도국제도시를 ‘영어통용도시’로 선포하는 등 인천영어공용도시 정책을 추진하자 국어단체와 지역 시민단체 등이 반대 의견을 개진해 관련 논의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책 제언이 제도권의 조치로 이어지지 않고 무산되는 경우도 많았다. 헌법 전문을 우리말로 순화하는 개헌이 무산된 게 대표적이다. 지난 2018년 한글문화연대·한글학회 등 53개 단체가 모여 헌법을 우리말로 다듬은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고 국회에 발의됐으나 끝내 본회의를 넘지 못해 무산됐다.

우리 실생활과 재산권 행사에 중요한 민법 등 법령에서 이해가 어려운 일본식 한자어 등을 순화할 필요성도 여러번 제기됐다. 이에 따라 해당 순화어들이 법안에 반영돼 국회 발의까지 이어졌으나 다른 현안 입법에 밀려 결실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법적‧행정적 절차에 필요한 각종 서류에 여전히 생소한 외래어가 사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 단체에서는 민간과 공공 영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국민들이 순화 필요성이 있는 외래어를 지적하면 시민단체는 의견을 모아 공공기관이나 언론에 요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활동을 위해서는 우리말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제기하는 국민들의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우리말 순화 활동의 중요한 축인 정부, 지자체, 공공기관의 행정용어는 ‘윗선’의 말과 글을 의식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고위공직자들이 고운 우리말 표현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론 등 미디어에서 적극적인 순화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주원 한글학회장은 “국가기관 또는 민간단체들이 순화어를 지정한 후 국민들이 이를 즐겨 사용하도록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국민 국어생활에 영향력이 큰 미디어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미디어에서 쉬운 의사소통을 위해 순화어를 쓰도록 힘쓰면 교육 등에도 자연스럽게 확산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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