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23일 오후 충남 서천군 서천읍에 위치한 서천특화시장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지난 23일 오후 충남 서천군 서천읍에 위치한 서천특화시장에서 만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의 비대위원장 사퇴요구…당무개입 논란

여권을 뒤흔들었던 ‘윤석열-한동훈 갈등’의 봉합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총선을 80일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불거진 갈등이라 봉합의 절박성은 대통령실이나 국민의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냉각기가 필요할 것이니 시간은 다소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대통령실에서는 갈등 봉합을 위한 여러 시나리오들이 흘러나왔다. 먼저 한 위원장과 용산 고위 인사의 회동을 갖고 그 뒤에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회동을 갖는 방안이 거론됐다. 그러던 상황은 지난 23일 윤 대통령의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 점검에 한 위원장이 함께 함으로써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이날 재난 현장 방문을 두 사람이 함께 하게 된 과정에는 대통령실과 한 위원장 사이의 사전 조율이 있었다. 양쪽 모두 서천특화시장에서 만나 일정을 함께 하는데 흔쾌히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한 위원장이 예정된 당 사무처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공천관리위원회 회의 일정을 연기하면서 윤 대통령에게 시간을 맞춰서 현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은 화해를 작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현장에서 기다리던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도착하자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폴더 인사’를 했고, 윤 대통령은 반갑게 악수를 하며 한 위원장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리기도 했다. 비서실장을 통해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까지 했으면서도 참모들 앞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배' 라고 했던 것이 이런 얘기였구나 싶은 광경이었다.

이후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함께 피해 현장을 돌면서 복구와 지원 대책을 점검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교통상황 때문에 전용 열차를 타게 된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게 "열차 같이 타고 갑시다"라고 제안했고, 한 위원장은 "자리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함께 전용열차에 올랐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열차 안에서 서로 간에 불거졌던 갈등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화가 오갔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통령실도 한 위원장도 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닫았다. 서울 도착 후 취재진과 만난 한 위원장은 ‘열차에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라는 질문에 “여러 가지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를 길게 나눴다”라고만 답했다. 그리고는 “저는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게 변함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형적으로는 한 위원장이 고개를 숙이고 윤 대통령이 껴안는 모습을 보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 봉합되는 모습을 연출했다. 어찌보면 ‘윤석열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벼락같이 여당 비대위원장을 물러나라고 했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거추장스러운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직접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방식이 그러하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재난 현장을 갈등 봉합의 이벤트로 삼았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여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별도의 회동 같은 인위적인 이벤트를 갖는 것보다 민생 재난현장을 함께 살피는 모습이 훨씬 자연스러운 화해의 방식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신속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의 갈등 상황이 길어질 경우 총선에서 공멸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지난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참패했던 국민의힘은 그동안 김기현 대표 체제에서 혁신을 통한 민심회복에 실패했다. 이대로 가면 22대 총선은 최악의 참패를 낳았던 21대 총선을 능가하는 역대급 참패를 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됐다.

그래서 김기현 대표가 사퇴하고 등장한 것이 한동훈 비대위였다.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 국민의힘은 활력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73년생 한동훈’이 이끄는 국민의힘은 이제까지의 정체된 모습에서 벗어나 젊어지고 빨라지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가 내려놨던 중도 확장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들이는 방향을 추구했다.

한 위원장이 전국 순회를 하는 과정과 지지자들이 모이는 장면에서 국민의힘은 한껏 고무되기도 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총선에 대한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국민의힘이었지만, 공천만 잘한다면 해볼 만하다는 표정들이 많아지기에 이르렀다. 아직은 일시적인 것인지 총선 때까지 지속될 것인지를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그래도 ‘한동훈 효과’는 바닥까지 추락했던 국민의힘을 일단 지상으로 끌어올린 힘을 보여줬다.

그런데 갑자기 윤 대통령이 한동훈더러 물러나라고 했다는 소식은 특히 총선에 출마하는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한동훈이 물러나면 대안이 부재한 현실은 다들 알고 있는 바이다. 선거는 80일도 남지 않았는데 새로운 비대위원장을 찾고 다시 비대위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런 당 체제로 총선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에서 셋째)가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에서 셋째)가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파국은 공멸’ 위기의식으로 신속한 봉합

현 상황에서 한동훈의 사퇴는 국민의힘이 공황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들 읽고 있었다. 게다가 한동훈이 진짜로 사퇴하면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역풍이 총선정국을 덮어버릴 위험이 농후했다.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대통령이 여당을 사당으로 여긴다는 비판과 역풍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당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쫓아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준석-김기현에 이어 다시 한동훈마저 한 달도 되지 않아 쫓아냈을 때 4월 총선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심판의 장이 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지금 국민의힘에서 한 위원장의 사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용산’이 덜컥 벌인 것이다. 보통의 정치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강서구청장 선거 때는 보궐선거의 원인제공자를 사면복권시켜 출마의 길을 열어줬다가 민심의 역풍을 맞아 참패당하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비대위원장을 물러나라고 압박하는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총선 패배를 자초하기로 작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동안 ‘윤심’만 추종하던 ‘친윤’의 대다수 의원들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버리는 모습을 보였을까. 한동훈 사퇴가 낳을 공멸의 상황에 대한 공포는 ‘친윤’ 의원들까지도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윤심’을 당에 전달해 온 이용 의원이 국민의힘 국회의원 전체가 모인 메신저 단체방에 ‘윤 대통령, 한 위원장 지지 철회’ 기사를 올렸을 때의 반응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중요 국면에서 연판장도 돌리며 집단 행동을 했던 ‘친윤’ 의원들이었지만 한 위원장 거취 문제가 올라오자 대부분 침묵하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이간질은 해당 행위'(하태경 의원), “한동훈 비대위로 가야 한다”(태영호 의원) 등 반발만 초래했다. 급기야 이용 의원은 예정했던 기자회견을 취소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한동훈 사퇴는 총선 참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친윤’ 의원들도 공유한 결과였다.

대부분의 ‘친윤’ 의원들까지 거리두기를 할 정도로 한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것은 무리수도 보통 무리수가 아니었다. 한동훈 사퇴 이후의 공멸 상황이 불을 보듯 뻔한데, 용산은 그런 결과를 염두에 두기는 한 것일까. 그래서 설마 싶었다. 이관섭 비서실장이 한동훈 위원장을 만나 대통령의 뜻이라며 사퇴하라고 요구한 것은 진짜 사실이었을까.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이관섭 실장이 한 위원장을 만나 사퇴 요구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도 대통령실은 이를 즉각 부인하지 않았다. 만약 사실 무근이었다면 펄쩍 뛰는 반응이 나왔을텐데 대통령실의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실은 "한 비대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대통령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면서도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 공천에 대한 대통령의 강력한 철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화법으로 해석됐다. 그러던 것이 사퇴 요구를 둘러싼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대통령실은 “사퇴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낳았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보면 이관섭 실장이 한 위원장의 사퇴 요구를 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한 위원장은 기자들로부터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 및 당무 개입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평가는 제가 하지 않겠다. 그 과정에 대해선 제가 사퇴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거절’이라는 표현을 통해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한 위원장이 용산을 상대로 사실도 아닌 말을 꾸며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 위원장은 “거기(3인 회동) 외에는 사퇴 요구를 들은 바 없다”고 했다. 3인 회동에서는 사퇴 요구를 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의 3인 회동은 한 위원장, 이 비서실장, 그리고 윤재옥 원내대표가 지난 21일에 함께 만났던 회동을 가리킨다. 이 자리에서 이 실장은 한 위원장이 서울시당 행사에서 김경율 비대위원의 마포을 공천을 공식화하며 손을 들어준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 공천이 대통령의 철학'이라는 점도 전달했다고 한다.

또한 김 비대위원이 유튜브 방송에 나와 김건희 여사 논란을 언급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난잡한 사생활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국민) 감성이 폭발해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 대한 대통령실의 강한 불쾌감도 드러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공천룰 문제 등 여러 대목에서 한 위원장과 이 실장이 언쟁을 벌이면서 사퇴 요구도 나오고 "이게 대통령의 뜻인가요"라는 반발도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 대한 언론 보도의 내용이다.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첫째)이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제16차 고위 당·정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첫째)이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제16차 고위 당·정 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번번이 위기 자초하는 대통령실 보좌

그렇다면 이 실장이 재량의 여지없이 대통령의 사퇴 요구를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언쟁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얹어서 사퇴라는 말을 한 것인지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면 이는 윤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런데 3인 회동에 대한 진실게임과는 상관없이 이 실장의 역할에 대해서는 책임론도 제기됐다. 여권의 파국을 막을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정무적 보좌를 했어야지, 아무리 대통령이 화가 났다 한들 곧바로 그런 식으로 사퇴 얘기를 꺼내서 대혼란의 상황을 낳았다는 지적이다.

얼마전 국민의힘으로 이적한 이상민 의원은 "이관섭 비서실장이 책임을 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어떤 뜻이나 감정을 전달한다고 해 쪼르르 와서 비대위원장한테 물러나라고 요구를 하고 그게 대통령 뜻이다 이렇게 전달을 하면 대통령을 위하는 건가"라는 것이 이 의원의 지적이었다. “대통령의 감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심기가 잘 안정이 될 때까지는 시간을 벌고, 또 한동훈 비대위원장한테는 대통령의 심기가 그런 상태니까 나름 노력을 해달라 이렇게 중간에서 조절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이 의원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신속하게 봉합의 국면으로 넘어가 더 이상 ‘이관섭 책임론’은 확산되지 않았지만, 이번 갈등 사태에 대처하는 대통령실의 모습은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엄청난 혼란이 불을 보듯 뻔한 한동훈 사퇴 요구를 덜컥 꺼냈다가 파장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여론의 역풍까지 불자 대통령실은 뒤늦게 허겁지겁 주워담는 모습을 보였다. 사퇴 요구를 거절한 한 위원장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이 더 이상 확전의 길로 가지 않고 사태를 봉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그렇게 벌여 놓고서야 수습에 나설 것이 아니라 애당초 선을 넘은 그런 개입은 하지 않는 것이 온당했다. 윤 대통령이 그런 뜻을 전하라고 했다면 일차적 책임은 윤 대통령의 것이겠지만, 중간에서 갈등을 조절하지 못하고 악화시킨 대통령실 참모들의 보좌에도 문제는 있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윤 대통령에게 적지않은 타격을 입힌 사태였다. 대통령실은 ‘사천’에 대한 우려를 내세웠다. 그러나 용산이 한 위원장의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선 첫번째 이유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한 한 위원장과 김경율 비대위원의 발언들을 꼽는 것이 여론의 흐름이다. 이는 한 위원장에 대한 용산의 대응 방식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감정적인 모습을 드러낸 사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단지 사천에 대한 우려가 우선적인 것이었다면 아마 대통령실이 그런 생각을 전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벌어진 광경은 마치 참고 있던 화가 폭발이라도 하듯이 격했을 뿐, 사후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이번 사태를 여론이 그렇게 해석하는 상황은 윤 대통령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남게 됐다. 자신의 배우자와 관련된 발언 때문에 대통령이 여당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한 위원장이 윤 대통령에게 허리를 90도 숙이는 ‘폴더 인사’를 크게 보도했다. 겉으로만 보면 한 위원장이 저자세가 되어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갈등 과정에서 여론의 우위를 점했던 것은 한 위원장이었다. 야당들도 대통령의 당무개입을 비판했지만, 특히 여당 지지층에서도 윤 대통령이 자살골을 넣을 것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지난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이념전쟁’을 선언, 중도층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윤 대통령의 자충수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었다.

여당 지지층 내에서도 ‘한동훈의 자기 정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윤 대통령의 돌출적인 개입을 비판하는 여론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일단 여론전에서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에 밀리는 모양새가 됐다. 한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빨리 덮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윤 대통령의 여권 장악력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여론과 총선 승부라는 중대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돌출적인 주문을 했던 윤 대통령의 자충수가 된 셈이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 윤 대통령으로서는 폴더 인사를 하는 한 위원장을 다시 품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4일 오전 국회에서 당 사무처를 순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4일 오전 국회에서 당 사무처를 순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동훈, ‘홀로서기’ 능력 어느 정도 보여줘

반면 한 위원장은 여론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홀로 서기’의 힘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등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갈등이 서로 짜고 하는 ‘약속대련’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윤 대통령이 한동훈을 띄워주기 위해, 혹은 극적인 반전의 효과를 노리고 이런 갈등을 일부러 만들어 내기에는 윤 대통령이 받게 되는 타격이 너무 큰 게임이다. 자신이 상처받아 가면서까지 그런 약속대련을 하는 대통령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한동훈을 ‘윤석열 아바타’로 만들고 싶은 이준석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당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는 한 위원장에게 대통령의 사퇴 요구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황을 의미했다. 아무리 팬덤층이 많은 한동훈이라 해도 대통령의 불신임은 당내 리더십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한 위원장은 “국민 보고 나선 일, 할 일 하겠다”, “제 임기는 총선 이후까지도 이어진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논란에 대해서도 “제 생각은 이미 충분히 말씀드렸다”면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시 갈등이 빚어질 수 있기에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한 위원장은 “국민들이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라든가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했던 기존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 초년병으로서는 쉽지 않은 뚝심을 보인 셈이다. 한 위원장은 폴더 인사를 했지만 그 인사 방식은 윤 대통령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흔히 하던 방식이다. 대신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의 입장을 뒤집는 일 없이 사태를 봉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위원장 또한 앞으로의 행보에서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자신의 소신만으로는 당을 이끌어가기 어려운 힘의 관계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파국은 공멸이라는 위기의식으로 대통령실도 확전을 자제하고 봉합을 택했지만, 한 위원장도 강력한 경고의 레드 카드를 받게 된 셈이다.

앞으로 공천이라는 분수령이 기다리고 있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국민의힘이 최대한 변화하고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역 의원들에 대한 물갈이와 새로운 인재들의 영입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현역 의원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일은 철저한 힘의 관계에 따른 권력투쟁이 된다. 한 위원장에게 힘이 실리면 반발을 제압하고 쇄신공천을 이루는 것이고, 힘이 약하면 반발에 휘둘리게 돼 있다.

그동안 한 위원장이 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윤 대통령과의 신뢰관계라는 배경이 작용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지지를 철회하면 한동훈 리더십도 당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 위원장도 이제는 말조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는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해 함구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한동훈의 딜레마가 있다. ‘윤석열 아바타’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중도확장성을 추구하려면 윤 대통령과의 차별화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자칫 윤 대통령을 자극해 양자 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상황은 아직은 한 위원장에게도 타격이다. 그러니 한 위원장은 총선 때까지 아슬아슬할 줄타기를 계속해야 할 운명이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용산과의 충돌을 피하는 고난이도의 정치를 해야 할 판이다.

애당초 정치란 그런 것일 게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원만하게 조정하고 타협하는게 정치 본연의 역할이니 한 위원장이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기는 하다. 여러가지가 복잡할 때는 민심으로부터 갈 길을 찾는 것이 답을 내준다. 사실 이번 갈등 과정에서 한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사태의 봉합을 주문하며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동훈이 용산의 압박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국민의힘 지지층의 여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권의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한동훈이 물러나면 안 되고 윤 대통령이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결국 용산이 서둘러 봉합하는 길로 몰아갔다.

대통령실로서는 공연히 평지풍파를 자초했다가 막상 뜻도 이루지 못하고 당 장악력의 한계만 드러낸 꼴이 됐다. 용산 대통령실의 부실한 보좌 문제는 계속된다. 초기에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면 별것 아니었을 김 여사 명품백 논란도 시간만 끌다가 정국의 이슈로 키워 놓는 우를 범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여당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는 소식도 귀를 의심하게 만들 일이었다. 이건 위기관리 능력의 문제 이전에 위기를 스스로 만들곤 하는 모습이다. 최종적인 책임은 윤 대통령에게 있겠지만 대통령실의 이런 보좌도 이해는 참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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