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공천심사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2일 공천심사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용진 후보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2년 8월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때 후보 합동토론회에서 했던 말이다. 이 대표는 당대표로 선출되면 자신을 비판한 의원들에 대한 ‘공천 학살’이 우려된다는 당내 목소리에 대해 “통합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며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당 운영을 통해 박용진 후보도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확실하게 만들겠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는 당시 당대표 경선 경쟁 후보였던 박용진 의원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이번 공천을 통해 드러난 민주당의 당 운영은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고, 박 의원은 ‘공천 걱정’을 하게 됐다.

박 의원은 사실상 컷오프를 의미하는 ‘의정활동 평가 하위 10%’ 판정을 통보받았다. 민주당은 현역 의원 평가 하위 10% 이하 해당자에게는 경선 득표의 30%를, 하위 10∼20% 해당자에게는 20%를 각각 감산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이익의 통보는 치명적인 것이다. 더구나 박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강북을에서는 친명계 정봉주 전 의원, 이승훈 민주당 전략기획부위원장과 3인 경선을 치른다. 박 의원은 하위 10% 통보를 받은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그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고는 재심 청구를 했지만 하루 만에 기각됐다.

박 의원은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 불공정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동안 박 의원이 쌓아온 의정활동의 성과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하위 10%’라는 판정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박 의원은 2018년 국정감사에서 사립 유치원 비리 문제를 공론화시키면서 ‘국감 스타’ 의원이 됐다. 모두가 언급을 피하던 문제에 대해 박 의원이 물꼬를 트자 여론이 움직였고, 유치원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과 사립학교법, 학교급식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또한 박용진은 재벌개혁에 앞장섰던 몇 안 되는 국회의원이었다. 2017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4조 5000억 원 규모 차명계좌를 폭로해 1030억의 차등과세와 46억 원의 과징금 징수를 이끌어냈다. 2018년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기업가치를 부풀리기 위해 고의로 분식회계를 했음을 암시하는 내부 문건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박 의원은 민주당 내부에서 팬덤 극단주의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하며 균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왔다. 그랬던 박 의원이기에 ‘하위 10%’ 통보는 본인은 물론이고 민주당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재명 지도부에 쓴소리를 자주 하던 비명계였다는 이유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박 의원이 겪은 상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명계이거나 이 대표를 비판했다는 숨겨진 이유 때문에 하위 판정을 받은 또 다른 박용진들이 부지기수다. 반면에 친명계라는 이유로 경선 과정도 없이 단수 공천을 받은 인물들은 차고 넘친다. ‘친명 횡재, 비명 횡사’라는 말은 민주당의 이번 공천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친명 본선행, 비명 경선행'이란 말도 나온다. 친명계 의원들은 대다수가 경선 없이 단수 공천을 받는 반면, 비명계 의원들은 대거 경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을 비꼰 표현이다. 친명계 김우영 강원도당위원장이 비명계 강병원 의원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에서 경선을 할 수 있도록 한 데 대해서도 논란이 불거졌다. 김 위원장은 강원도당을 책임진 당직자가 당과 협의도 없이 서울로 출마하려 한다는 이유로 당 지도부의 주의 처분까지 받았었다. 그런데도 다시 경선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홍익표 원내대표와 고민정 최고위원은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김 위원장의 은평을 출마가 부적절하다며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위 판정 통보를 받은 비명계 의원들의 반발은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김영주 국회부의장이 탈당했고, 서울 동작을 지역구가 전략 지역으로 지정돼 공천에서 배제된 이수진 의원이 뒤를 이어 탈당했다. 박영순 의원은 지난 27일, 설훈 의원은 28일에 탈당을 선언했다.

민주당을 오랜 세월 지켜온 5선 중진의 설훈 의원은 “단수 공천을 받는 사람이 50명 정도 되는데 부산과 경남을 빼고 단수 공천의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윤건영 의원 한 명뿐”이라며 “비명 의원들은 다 경선하게 됐는데 말이 경선이지 소위 자객공천을 당하고 있다”고 이 대표의 공천을 직격했다. 경선을 치르지 않은 채 탈당을 하고 이낙연 대표의 새로운미래로 합류하는 의원들의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8일 은평구 한 헬스장에서 직장인 정책간담회 전 런닝머신을 타고 있다. 러닝머신 화면에 같은 시간 국회 소통관에서 공천 관련 기자회견 중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뉴스가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8일 은평구 한 헬스장에서 직장인 정책간담회 전 런닝머신을 타고 있다. 러닝머신 화면에 같은 시간 국회 소통관에서 공천 관련 기자회견 중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뉴스가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임종석 컷오프로 ‘문명 대전’ 촉발…대권 가도 걸림돌 제거하려는 이재명의 선택

게다가 지난 27일에는 친명계와 친문계 사이의 가장 큰 뇌관이던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컷오프가 발표됐다. 민주당 전략공관위는 서울 중·성동갑에 나선 임 전 실장을 컷오프하는 대신, 전현희 전 국민원익위원장을 전략 공천했다. 친문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그를 탈락시킨 것은 친명계과 친문계 사이의 ‘명문 대전’을 낳는 폭탄이었다. 유일한 친문계 지도부였던 고민정 최고위원은 즉각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지금의 위기를 지도부가 책임을 갖고 치열한 논의를 해서라도 불신을 거둬내고 지금의 갈등 국면을 잠재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임 전 실장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며 공천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당 지도부에 요청하고 유세를 계속했지만, 이 대표는 “세대교체도 있어야 하고, 특히 우리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선수 선발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반발들을 일축했다. 친명계의 정청래 최고위원은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으로 깃발과 상징이 계승됐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민주당은 심리적 분당 사태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임 전 실장 컷오프가 발표된 27일에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는 비명계 의원들의 쌓였던 울분이 분출되는 장이 됐다. 홍영표 의원은 이 대표를 겨냥해 “공천과 혁신을 하다 보면 가죽을 벗기는 아픔이 있는데, 당 대표는 자기 가죽을 벗기지 않고 본인 손만 피범벅”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했다.

오영환 의원은 “사태 수습을 위해 조정식 사무총장, 김병기 수석사무부총장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친명계 핵심들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의총에서는 당대표를 향한 의원들의 직설적인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 대표는 듣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격렬한 항의 앞에서의 침묵은 그런 항의들에 대한 무시를 의미한다.

이 대표의 생각은 무엇일까. 이 대표가 친문계와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임종석 컷오프를 한 것은 향후 그를 구심으로 친문계가 결집할 경우 자신의 대권 행보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양산까지 가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문명(문재인+이재명) 정당’을 약속했지만 결국 문 전 대통령도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자신의 대권 재도전을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 세력과의 의리고 뭐고, 오직 자기이익에 충실한 이재명 리더십은 차갑고도 무섭기까지 하다.

비명계 인사들을 물러나게 한 자리에는 대부분 친명계 인사들이 투입돼 친명으로 물갈이를 한다. ‘비명 횡사’의 광경이 한층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는 이 대표의 측근들에게서는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횡재’의 모습들이 대거 보이기 때문이다. 열혈 친명계인 이경 전 부대변인, 현근택 변호사, 강위원 특보 등이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한 논란 때문으로 자기 희생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친명계 원외 인사들은 이번이야말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총출동하는 모습이다. 이 대표가 이번 총선에서 챙겨줘야 할 측근들의 숫자는 50명에 달한다. 특보들, 경기성남 라인들, 친명 원외조직들, 친명계로 갈아탄 의원들에 이르기까지 22대 국회 진출을 노리는 인사들이 너무도 많다. 애당초 민주당이 쇄신 공천을 하는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서는 ‘이재명의 사람’들부터 불출마의 결단을 내리는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친명계 측근들의 ‘희생’이 아닌 ‘횡재’를 선물로 안겨줬다. 문 전 대통령까지 이 대표에게 직접 당부했던 친명의 자기 희생이 안 보인다는 비판이 비등하자 뒤늦게 친명 중진인 안민석·변재일 의원 등의 지역구도 전략 지역구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있는 다리는 끊긴 상황이다.

보다 못한 정세균·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지난 21일 입장문을 내고 “시스템 공천, 민주적 원칙과 객관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며 이 대표가 나서 상황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권노갑 상임고문,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 등 민주당 원로들도 입장문을 내고 “작금 벌어지고 있는 민주당 공천 행태가 민주적 절차와는 전혀 동떨어지고, 당대표의 사적 목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며 “이를 개탄한다”고 이 대표를 비판했다.

27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이재명 대표와 홍익표 원내대표가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27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이재명 대표와 홍익표 원내대표가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친명 횡재-비명 횡사’ 반발 확산…민주당, 심리적 분당 사태 직면

이쯤 되면 ‘공천 파동’이라고 할만한 상황이다. 당 내부는 분열됐고 이 대표의 ‘사천’(私薦)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시선도 따갑다. 총선 승리를 목표로 한다면 어떻게든 수습하고 전열과 여론을 정비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작금의 사태를 대하는 이 대표의 태도이다.

민주당은 내홍에 휩싸이고 친민주당 성향 언론들까지 비판하는 '공천 파동'으로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이 대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당의 상황과는 달리 이 대표는 “어느 때보다 혼란이 거의 없다”며 현재와 같은 공천의 강행 의사를 밝혔다.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이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며 “언제나 경쟁 과정에선 본인의 생각과 타인의 평가가 일치하지 않기에 불평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점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말이다.

특히 당내 일각의 대표직 사퇴 요구에 대해서는 “툭하면 사퇴하라 소리 하는 분들 계신 모양”이라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365일 대표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달라질 기미가 전혀 없다. “시스템 공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주장이다. 기자들이 이 대표에게 공천 내홍에 대한 대책을 물어보면 이 대표는 일절 대답하지 않는다. 이런 이 대표의 모습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마이 웨이’를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대표는 이미 작심을 하고 이런 공천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친명계 현역 의원을 대거 단수 공천했다. 지난 25일 발표된 7차 공천 결과도 ‘친명 단수, 비명 경선’이었다. 민주당 공관위는 이날 17개 단수공천 지역과 4개 경선 지역을 발표했는데, 단수 공천이 확정된 17명 중 15명(88.2%)이 친명계로 파악됐다.

최고위원인 정청래(서울 마포을), 서영교(서울 중랑갑) 의원과 수석대변인 권칠승(경기 화성병) 의원,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김영진(경기 수원병) 의원이 단수 공천을 받았는데 모두 대표적인 친명계였다. 정책위 의장인 이개호 의원도 전남 담양-함평-영광-장성에 단수 공천됐는데, 과거 이낙연계였지만 최근 친명계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도 단수 공천을 받은 백혜련(경기 수원을), 이재정(경기 안양동안을), 강득구(경기 안양만안), 민병덕(경기 안양동안갑), 한준호(경기 고양을), 김용민(경기 남양주병), 문정복(경기 시흥갑), 김승원(경기 수원갑), 유동수(인천 계양갑), 위성곤(제주 서귀포) 의원 등도 모두 친명계로 분류된다. 반면에 단수 공천을 못 받은 현역은 친문계 도종환 의원과 비명계 박영순·송갑석·이용우 의원 등이었다.

이 대표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친명 횡재, 비명 횡사’ 공천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일까. ‘사천’ 소리를 듣는 이런 방식의 공천을 하면 민주당의 의석수는 지금보다 최소한 수십석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여론의 추이에 따라서 총선 과반수 승리는 고사하고 국민의힘에 패배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도 충분히 내다볼 수 있다.

정영환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14차 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영환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14차 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공천 쇄신 미약하지만…민주당의 공천 파동으로 여야 ‘골든 크로스’ 발생

실제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는 그런 조짐이 읽혀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2월 19~23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25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민주당은 39.5%의 지지율을 기록해 지난해 2월 3주차(39.9%) 이후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왔다. 반면에 국민의힘은 43.5%를 나타내 지난 2월 2주차에 이어 40%대로 상승했다. 이 조사에서 양당 지지율은 국민의힘이 약 1년 만에 더불어민주당을 앞서며 역전하는 ‘골든 크로스’가 나타났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41.9%, 부정 평가는 54.8%를 기록했다. 윤 대통령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40%대로 집계된 것도 지난해 6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정당 지지도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 대통령 국정 수행 평가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0%p.) 또 메타보이스가 JTBC 의뢰로 지난 2월 24~25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국민의힘 38%, 민주당 30%로 나타났다.(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이상 여론조사들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러한 지지율 변화에는 물론 여권에 유리한 요인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리얼미터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 상승에 대해 “그린벨트 규제 개편, 원전 R&D 금융 지원 및 산업 생태계 정상화 지원책 등 4차례에 걸쳐 이어지는 지역 발전 행보와 의대 증원 추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확산이 40%대 수복을 이룬 요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명 횡사’ 공천 파동이 민주당의 지지율을 끌어내린 데 있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재명식 공천을 밀어붙이고 있다. 지금 이 대표에게는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얻게 될 전체 의석수보다 민주당을 확고부동한 ‘이재명 당’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우선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차기 대선에 재도전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이 대표로서는 지금의 민주당을 갖고는 21대 대선이 있는 2027년 3월까지 안정적으로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할 법하다.

그동안 당내 비명계는 걸핏하면 자신의 사퇴를 요구해 왔고, 심지어 지난해 9월에는 비명계 의원들의 가담 속에 ‘이재명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니 이 대표는 공천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당의 분열로 수십석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민주당을 철저한 ‘이재명당’으로 만들어놓는 것이 더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사법 리스크’로 감옥에 가는 사태도 막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설혹 민주당이 패배하는 총선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 대표는 사퇴하지 않고 차기 대권 재도전의 길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 당선된 민주당 의원들의 대다수가 친명계인 당 구조에서는 총선 패배의 결과가 나온들 ‘이재명 사퇴’의 목소리를 낼 의원들이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재명이 아닌 다른 인물이 대선 후보 자리를 넘보는 환경이 불가능하도록 지금 대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민주당 패배 가능성 높아져…민주당이 죽는데 이재명만 살 수 있을까

문제는 이 대표의 그러한 판단과 구상이 너무도 조급하고 노골적인 것이라 총선 판세를 민주당에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바꿔놓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에 치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은 ‘윤석열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지금 같은 공천을 고수해서 비판적 여론을 확산시킬 경우 4월 총선은 ‘윤석열 심판’이 아닌 ‘이재명 심판’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진다.

친명계에서는 지금은 당내 갈등이 불가피하지만 곧 공천이 끝나고 총선 기간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번 공천은 ‘이재명 리더십’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 후과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의 표심이 반년 만에 반전되는 상황은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대한 민심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열릴 수 있는 길이다. 게다가 여권 쪽에서는 윤 대통령이 당시 주요 패인이었던 ‘이념’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민생’ 챙기기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윤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대중에 다가가면서 새로운 국민의힘의 모습을 보이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민주당이 ‘비명 횡사’ 공천을 하면서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때 거둔 압승이 재연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오만한 착각일 뿐이다. 정치에서 오만만큼 치명적인 독이 없음은 우리 정치사가 증언해주고 있다.

물론 국민의힘의 공천에서도 현역 의원 물갈이가 미약하다. 친윤 핵심인 장제원 의원만이 지난해 12월 불출마 선언을 했을 뿐, 한동훈 비대위 체제에서도 ‘친윤·중진’들의 자기 희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특히 친윤계와 대통령실 비서관급 이상 용산 고위직은 대부분 공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친윤 핵심으로 꼽히던 권성동·윤한홍·이철규 의원, 그에 이어 정진석·정점식·강민국·박수영·유상범 의원 등 당내 대부분의 친윤 의원도 차질 없이 공천을 받았다. 강승규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과 주진우 전 법률비서관, 이원모 전 인사비서관, 전희경 전 정무비서관도 공천이 확정됐다. 윤 대통령은 공천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인지도가 높은 친윤 의원들과 용산 참모들은 유리한 환경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영남지역의 경선에서도 다선 중진들이 압도적 우위를 보여 노쇠한 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인재들의 영입과 공천이 기대에 못 미친다. 국민의힘 공천 과정이 민주당과 달리 조용하게 진행되는 것은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는 현역 교체의 폭이 적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공천에서 드러나는 한계를 민주당의 막무가내식 ‘비명 횡사’ 공천이 덮어주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공천이 워낙 상식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국민의힘 공천의 문제점 정도야 국민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에도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때도 그랬는데 달라지지 않은 구조이다. 이재명이 싫어서 국민의힘을 찍는 투표 행태는 이번에도 재연될 가능성을 이 대표 스스로가 높여 놓았다.

그러니 지금 민주당의 최대 리스크는 ‘이재명 리스크’가 됐다. ‘사법 리스크’도 아닌 ‘공천 리스크’다. 특히 중도층과 부동층의 등을 돌리게 하는 이 대표의 공천은 결국 민주당과 자신에 대한 자해 정치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렇게 친명 ‘싹쓸이’ 공천을 하면 차기 대권의 길이 보장될 것이라는 이 대표의 기대는 치명적인 판단 착오이다. 민주당이 죽는데 이재명만 살 수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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