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화가 났다.”

지난 4월 10일 밤 집권 여당 국민의힘이 당한 역대급 참패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번 22대 총선에서는 ‘정권 심판’ 태풍이 불었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은 175석을 얻으며 압승을 거뒀다. 여기에 조국혁신당이 얻은 비례대표 의석 12석을 합하면 양당 연합만으로 187석이 된다. 다시 개혁신당 3석, 진보당 1석, 새로운 미래 1석을 합하면 ‘범진보정당’ 기준으로는 189석, ‘반윤정당’ 기준으로는 192석이 된다. 반면 국민의힘은 지역구 의석이 90석에 그쳐 비례 위성정당 국민의미래의 비례대표 의석 18석을 합해도 108석에 그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이해찬·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 홍익표 원내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 민주당 개표 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본 뒤 손을 잡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이해찬·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 홍익표 원내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 민주당 개표 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본 뒤 손을 잡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야당 악재들 덮어버릴 정도로 '정권심판론' 위력 강했다

국민의힘은 4년 전 총선에서도 참패를 당하기는 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지역구 163석에 위성정당 더불어시민당의 비례대표 의석 17석을 합쳐 180석을 차지했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위성정당의 비례대표와 무소속 의석을 합쳐 107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완패한 바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야당이었기에 충격파는 지금보다 덜한 편이었다.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여당이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5년 내내 ‘여소야대’ 정부가 된 것이다. 집권하고서도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퇴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번 참패의 심각한 의미는 4년 전을 훨씬 능가한다.

물론 국민의힘으로서는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고 할 수도 있다. 야권 일각에서 나왔던 전망대로 만약 ‘반윤석열 야권연합’이 200석을 넘는 결과가 나왔다면 대통령 탄핵소추, 개헌,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 행사 무력화 등이 모두 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식물정부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중도 퇴진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일단 피했음에 안도해야 하는 것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처지다.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 결과는 균형적이지 않아 보이는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은 심각했지만 반대로 민주당 쪽에서도 온갖 악재들이 선거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이재명 지도부는 ‘비명횡사, 친명횡재’ 소리를 듣는 공천을 하면서 여론의 비판을 받았고, 선거 막판에는 양문석‧김준혁 후보 등을 둘러싼 논란을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대개는 역풍을 낳을 수 있는 악재들이었는데도 민주당은 압승할 수 있었다. 야당의 여러 악재들을 덮어버릴 만큼, 정권 심판 태풍의 위력이 강했던 것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총선 앞두고 부상한 ‘용산발 리스크’

윤 대통령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식 확산

대체 무엇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것일까. 이런 결과를 낳은 가장 큰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민심의 거부와 심판이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선택의 기준으로 본 것은 한동훈도 이재명도 조국도 아닌 윤석열이었다.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은 윤 대통령이 달라졌는가 여부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 데 실패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아무리 혼자서 호소하고 다녀도 윤 대통령이 달라지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었다.

사방에서의 쓴소리에 귀를 닫아버린 윤 대통령의 ‘자업자득’ 결과다. 이미 6개월 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민심은 정권 심판의 경고음을 냈다. 당시에도 윤 대통령은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야당 세력을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로 규정하면서 느닷없이 이념논쟁에 불을 붙였다. 보수층의 결집을 의도했을지 모르지만 구태의연한 이념 논쟁에 중도층이 대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인데 민생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불통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보궐선거 참패 이후 대통령실은 ‘이념’을 거둬들이고 ‘민생’을 전면에 내거는 변화를 보여주기는 했다. 총선 기간을 앞두고도 윤 대통령은 연일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생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윤 대통령이 자꾸 앞에 나서는 장면 자체가 국민의힘이 선거를 치르는데 부담이 될 정도로 ‘용산발 리스크’에 대한 부담은 커질 대로 커져 버린 상황이었다.

총선을 몇 달 앞두고 국민의힘 내부에서 대두된 ‘수도권 위기론’ 속에 한 비대위원장이 등판했다. 그래도 윤 대통령과는 다른 정치 스타일을 보이면서 ‘한동훈 효과’를 한동안 누리기도 했다. 총선을 앞두고 한때 국민의힘 지지율이 민주당 지지율을 앞서는 골든 크로스가 발생한 것도 ‘한동훈 효과’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힘의 회복 국면에서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곤 했던 것은 역시 ‘용산발 리스크’였다.

한 비대위원장은 지난 1월 18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논란에 대해 “국민이 걱정할 부분이 있다”는 발언을 꺼내 ‘윤-한 1차 갈등’이 생겨났다. 이 갈등은 서천군 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한 위원장이 윤 대통령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봉합됐지만 ‘국민이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대통령실은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지나갔다. 윤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부담스러워해 기자회견 대신 KBS를 통한 단독 대담을 택했다.

그리고는 사과나 디올백의 사후 처리에 대한 분명한 설명없이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누구한테 박절하게 대하기 어렵다”고만 말하고 지나갔다. 이는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이 ‘내로남불’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선거 기간 내내 ‘디올백’ 논란이 제기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이어 터져 나온 이종섭 주호주 대사 출국과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의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 발언 논란은 다시 ‘용산’을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여당에 이번 총선의 최대 악재로 부상했다. 채모 상병 사망사건 수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대상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주호주 대사로 임명하고, 법무부가 출국금지 조치를 해제해 출국시킴으로써 논란은 불거졌다.

황 수석도 사석에서 MBC 기자를 향해 들으라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회칼 테러’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한 비대위원장은 황 수석 발언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이종섭 대사에 대해서도 “즉각 귀국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윤-한의 2차 갈등’이 빚어졌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아우성 속에 결국 ‘황상무 사퇴, 이종섭 귀국과 사퇴’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이미 여론이 악화될대로 악화된 이후의 뒤늦은 수습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경기 부천시 소사구의 심장전문병원인 부천세종병원을 방문해 의료진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경기 부천시 소사구의 심장전문병원인 부천세종병원을 방문해 의료진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임기 5년을 여소야대에 갇히게 된 윤 대통령

여기에다 윤 대통령을 총선기간 내내 전면에 등장하게 만든 것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 사태의 장기화였다. 정부의 방침에 의료계는 반발했고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을 하며 병원 현장을 떠나기 시작해 의료 공백 사태가 계속됐다. 의정 갈등의 장기화가 환자들의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오면서 오히려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에 악재가 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의료계가 증원 철회를 조건으로 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갇혀버렸다.

총선을 앞두고 다급해진 것은 정부와 여당이었다. 누구의 입장이 옳으냐 그르냐에 상관없이 의료 공백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정부의 모습 또한 총선에서 여당의 악재가 돼버린 것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거부감은 심지어 “그래도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대파 발언’까지도 국민의힘에 총선 악재가 되는 장면을 낳았다. 사실 발언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취지가 이해되는 말이었는데도 물가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윤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커질 대로 커진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여당의 총선 참패 책임이 모두 용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의힘 자체의 선거전략 부재도 참패를 낳은 한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한동훈표 공천’은 보수정당의 변화를 요구하던 민심에 부응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에 비하면 불공정 논란은 적었지만 ‘조용한 공천’이 능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공천 과정에 별다른 반발도 없고 조용하기만 했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와 쇄신의 강도가 약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요한 혁신위가 불을 지폈던 ‘주류 희생론’은 한동훈 비대위에서도 이행은커녕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현역 불패’의 공천이 됨에 따라 국민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선거의 승부를 좌우하는 중도확장성 확보에 국민의힘이 실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초 한 비대위원장은 이념 보수가 아닌 실용 보수의 의지를 밝혀왔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종북세력 척결’ 문제를 전면에 내걸면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야당의 정권심판론에 맞서 한 위원장이 내건 것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한 전략이 됐다. 여당은 야당이 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강점을 살려 대한민국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대한 비전을 내놨어야 했다.

더욱이 국민의힘은 중도확장성은 고사하고 보수층의 결집조차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 모습을 내내 보였다. 국민의힘의 선거 캠페인은 한 위원장 개인이 혼자 감당하는 광경이 계속됐다. 특히 수도권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경원‧안철수 후보 등의 중진들도 자기 지역구에 발목이 잡혀 전체 선거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했고, 보수진영의 다른 유력 인물이 결합하며 지지층을 결집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이재명-이해찬-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3인 체제로 지지층의 결집을 극대화했던 민주당과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오히려 보수진영 내부에서는 강성 보수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한 위원장에 대한 비난과 성토가 이어지면서 보수층의 분열까지 생겨났다. 국민의힘 공천에서 강성 우파 인물들이 배제된 데 대한 반감이 존재하던 차에 한 위원장이 ‘황상무 사퇴, 이종섭 귀국’ 요구를 꺼내자 “한동훈이 좌파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비난이 강성 보수층 내에 확산됐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중도확장성을 가져야 한다는 선거의 기본에 아랑곳하지 않는 강성 이념 보수층의 영향으로 지지층의 결집조차 이루지 못한 보수진영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선거 막판에 가서야 민주당 대승 예고에 위기의식을 가진 60~70대 보수층이 적극적으로 사전투표에 참여하면서 국민의힘으로의 막판 보수층 결집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국민의힘은 100석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김건희 여사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김건희 여사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절대다수 의석의 야당, 일방적 국회권력 되면 대선서 '역풍'

태풍 같은 정권심판론 덕분에 횡재를 하게 된 것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다. 사실 민주당으로서도 쉽지만은 않은 선거였다. 민주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21대 국회에서 보인 ‘입법 독주’는 그동안 상당한 역풍을 낳았다. 그리고 민주당 공천에서 나타난 ‘비명횡사, 친명횡재’ 논란은 이 대표의 사당화에 대한 비판 여론을 낳기도 했다.

선거 막판에 부상한 양문석‧김준혁 후보 등의 논란에 대처하는 민주당의 모습도 문제가 있었다. 과거 같으면 그런 정도의 논란거리가 등장하면 공천 취소 같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여야 정당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후보를 둘러싼 논란이 그렇게 뜨거워지는 데도 민주당 지도부는 개입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전체 판세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이긴 선거이니 며칠만 더 버티면 된다는 식의 모습은 사실 전에 같으면 역풍을 낳을 수 있는 오만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논란의 당사자들은 모두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을 했던 이 대표에게 면죄부를 넘어 훈장이 부여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민주당이 후보들을 제대로 걸러내지도 않고서도 압승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정권심판론 덕분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준 역할을 이재명이 했다면, 이번 총선에서 이재명에게 총선 압승을 안겨준 역할을 윤석열이 한 셈이다. 정치라는 것이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드는 광경들이다.

결국 이 대표는 이번 총선 결과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온갖 ‘사법 리스크’들을 넘어 압승을 이뤄낸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대표로서는 법원이 의식할 정치적 부담에 큰 기대를 걸 법도 하다. 민주당 내에서는 3년 뒤 대선의 경쟁 주자가 없는 것이 이 대표가 거둔 또 하나의 성과일 것이다.

그동안 당내에서 이 대표의 사당화를 비판하면서 발목을 잡았던 비명계가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대부분 정리됐다. 박용진 의원이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같은 경우는 공천을 주지 않으면서 탈락시켰고, 이낙연 전 총리를 비롯한 조응천‧이원욱 의원 등 비명계는 알아서 당을 나가줬으니 이 대표로서는 대권 재도전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 마련됐다. 민주당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재명 당’이 됐으니 적어도 민주당 안에서 이 대표와 경쟁할 다른 대선 주자가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 대표로서는 민주당 밖에서 조국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으니 긴장을 풀 수는 없다. 야권에서 조국혁신당 돌풍은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를 넘어 ‘총민대조’(총선은 민주당, 대선은 조국혁신당)로 갈 가능성을 열어놨기 때문이다. 정권심판론 덕분에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호불호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자신을 향한 ‘불호’의 정서를 넘어서지 못해 패했지만 그런 흐름은 여전히 살아있다.

조 대표는 이 대표와는 전혀 다른 배경과 캐릭터의 인물이다. 워낙 여러 변수들이 두 사람의 앞길에 놓여 있어서 예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조 대표가 이 대표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약 이 대표로 차기 대선 승리가 불확실하다는 야권 내부의 여론이 강해질 경우, 조 대표가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이번 총선에서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을 일순간에 소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은 조 대표에 대한 대법원 선고다. 앞으로 대법원 상고심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질 경우, 언제든지 구속 수감되고 대통령 선거 출마자격도 상실하는 것이 조 대표가 처한 상황이다. 그런데 선고를 어떻게 내리든 부담스럽게 된 대법원이 선고 차제를 계속 미룰 수도 있고, 선고는 하되 2심에 대한 부분파기 환송 방식으로 재판을 장기 표류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일체의 정치적 고려없이 법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사법부 본연의 모습이겠지만, 정치적 부담을 가급적 껴안으려 하지 않는 사법부의 모습을 그동안 많이 지켜봤던 터라 대법원의 선고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다.

이 대표로서는 상황에 따라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조 대표와 우군으로서의 협력을 해나가야 하는 묘한 상황을 맞았다. 더구나 ‘사법 리스크’는 조 대표뿐만 아니라 이 대표 자신도 걸려 있는 변수이니 야권의 대선 주자를 둘러싼 셈법은 무척 복잡하다.

어쨌든 비례대표 선거에서 불었던 조국혁신당 돌풍도 이번 총선의 이변으로 꼽힌다. 조 대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녀 입시비리 의혹과 민정수석 재직 당시 감찰 무마 혐의 등으로 기소돼 2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법정 구속만 면했지 앞으로 대법원 선고에 따라 언제 구속 수감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무리한 총선 참여라는 지적이 진보 성향 언론들에서까지 나왔지만, 결과는 비례대표 12석을 얻는 대약진이다. 이는 정권심판론의 바람이 유난히도 강했던 환경에서 조국혁신당이 내건 강경한 투쟁적 구호들이 먹혀든 결과로 풀이된다.

조국혁신당은 “3년은 너무 길다”를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야권 200석’만 되면 윤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혀왔다. 그리고 김건희 여사와 한 위원장을 겨냥한 특검법을 공약하는 등 민주당보다 강경한 대여 투쟁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전에 같으면 그 정도로 강경한 입장들은 중도층의 역풍을 우려해 민주당도 조심하는 내용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조국혁신당은 윤석열 정부를 상대로 보다 전투적일 것을 요구하는 야당 지지층 일각의 호응을 얻어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조국혁신당이 내건 투쟁적 노선이 22대 국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조국혁신당이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조 대표의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강경한 입장들이 22대 국회를 극단과 극단의 대결장으로 갇히게 만들 것에 대한 우려는 존재한다. 상대 세력을 오직 타도와 탄핵과 특검의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정치는 없고 투쟁만이 난무하는 국회에 대한 우려가 기우만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는 압승을 거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강경 기조를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여권 세력도 맞대응하며 ‘강 대 강’의 대결로 갔을 때 21대 국회를 능가하는 전쟁 같은 정치가 펼쳐질 위험이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윤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받아들이고 이제라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5년 전체를 여소야대 국회에 갇히면서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단독 과반 의석을 훨씬 넘은 민주당은 국회의장은 물론 주요 상임위원장 자리도 차지하면서 법안·예산 처리를 주도할 수 있다. 국무총리·헌법재판관·대법관 임명동의안도 민주당의 선택에 따라 좌우된다. 대통령을 제외한 국무총리·국무위원·법관 등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도 민주당의 뜻에 따라 가능하다.

개표가 끝난 지난 11일 윤 대통령은 “총선에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비서실장을 포함해 정책실장과 수석들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다고 하니 조만간 대통령실의 인적 쇄신과 국정 쇄신 내용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단순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민심에 부합되는 쇄신이라야 의미가 있을 테니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한 비대위원장도 “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비대위원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민심은 언제나 옳다”며 “국민의 선택을 받기에 부족했던 우리 당을 대표해서 국민들께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국민의 뜻을 준엄하게 받아들이고 저부터 깊이 반성한다”는 말이었다. 패배 책임론을 둘러싼 ‘윤-한의 갈등’은 일단 나타나지 않을 분위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실제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민의힘 당선자들이 영남에 편중된 상황은 국민의힘의 쇄신을 제약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정치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민심을 외면한 쪽이 패배할 뿐이다. 3년 후면 다시 대통령 선거가 돌아온다. 야당도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했다고 무절제하고 일방적인 국회 권력의 모습만 보인다면 3년 후에는 다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항상 경계하고 스스로 다스려야 함은 여전히 여야 불문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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