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의 지도부가 다시 공백 사태를 맞았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취임했던 시기가 지난해 12월 26일. 김기현 전 대표가 사퇴한 지 13일 만에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섰다. 그러나 비대위 체제도 4.10 총선 참패 직후 한 전 위원장이 사퇴하며 조기 종료됐다. 일단 국민의힘은 윤재옥 원내대표가 당 대표 권한대행을 겸임하는 임시 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재옥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당선인들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자총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윤재옥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당선인들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자총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탄핵이후 재기했던 보수정치 다시 무너져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워낙 최악의 참패를 당함에 따라 그 충격은 일시적일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3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여당이 108석에 불과한 의석에 그쳤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4년 전 21대 총선에서도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이 참패를 당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야당이라서 충격의 파장이 지금보다는 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한복판에 불어닥친 정권심판론의 태풍으로 집권세력 전체가 공황 상태에 들어가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제 윤석열 정부는 임기 5년 전부가 여소야대의 구도 속에 갇혀버린 최초의 정부다. 무엇 하나 자신의 결정대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임기를 마치게 된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관련 입법들이다. 윤석열 정부가 올해 들어 개최한 24회의 민생토론회에서 내놓은 국토교통부 정책 179개 가운데 법 개정이 필요한 과제는 17개에 달한다. 그 가운데 시장의 관심을 가장 모았던 과제로는 ‘공시가 현실화 로드맵 폐지’와 ‘재개발·재건축 안전진단 완화’ 등이 있다.

그런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은 법적 의무 사항이다. 이 로드맵을 폐지하려면 현행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문재인 정부에서 밀어붙였던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를 뒤집고,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합의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법 개정은 이뤄지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2020년 수준의 현실화율을 고정하는 편법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각종 도시정비사업 규제 완화도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 재건축 추진 단지들의 관심을 모으는 안전진단 통과 시기 조정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비수도권의 개발부담금 한시 면제는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또한 소규모 정비사업의 주민동의율 완화, 조합설립 동의요건 완화, 용적률 상향에 따른 기부채납 방식 변경 등을 위해선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에서 규정한 사안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이 같은 재건축 활성화 정책에 동의해줄 가능성이 적기에 한때 동력을 찾았던 재건축 사업에 제동이 걸릴 것이 예상된다. 국토부 소관 외에도 부동산 세제 개편을 위해서 필요한 여러 법 개정 사안들이 쌓여있지만, 역시 민주당이 순순히 동의해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정권은 국민의힘이 갖고 있는데 주요 정책들은 민주당의 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어정쩡하게 남은 3년 임기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소야대의 지속 속에서 윤석열 정부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무력했던 정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직접 정진석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직접 정진석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 대통령, ‘국정노선 근본적 변화’ 필요

심판의 타깃이 된 윤 대통령은 당장 민심에 순응하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처지다. 민심 이반의 결과로 여당이 궤멸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가는 22대 국회에서 여당의원 일부까지 가세해 탄핵 소추를 당하거나, 지지율이 바닥이 아니라 지하실로 내려가 버리는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식물정부가 되는 것을 넘어 레임덕(Lame duck‧권력누수)이 본격화됨을 의미한다. 이제라도 민심을 받들어 윤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운영 방식과 스타일을 확 바꾸고 그래서 ‘뉴 윤석열’이 되는 것밖에 살길은 없다.

최근 한 언론에는 윤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지난 22일자 기사에서 “지난 1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통화한 직후 대통령실 비서실장·안보실장·정책실장 등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총선 결과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의 각오를 밝히면서 “그동안 나름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현장을 뛰어다녔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 스타일을 많이 바꿔야겠다”면서 “일정과 메시지, 말도 줄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께 친근하게 다가가는 대통령이 돼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뒤늦게나마 윤 대통령이 민심의 반감을 낳는 자신 스타일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얘기가 된다. 만시지탄이다. 윤 대통령은 올들어 24차례나 민생토론회를 개최했기에 열심히 소통을 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언제나 자신의 얘기만 장황하게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스타일을 보여왔다.

반면에 직언이나 쓴소리를 대통령에게 할 쌍방향 소통의 길은 막혀 있었다. 출근길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데 이어 신년 기자회견조차도 KBS에서의 단독 대담으로 대체할 정도로 윤 대통령은 불통에 익숙해진 모습이 된 것이다. 의대 2000명 증원 문제를 둘러싼 의-정갈등의 장기화 사태 속에서 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것도 여당이 총선을 치르는데 큰 악재가 됐다.

총선 패배 이후 윤 대통령이 실제로 달라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이재명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며 영수회담을 전격 제안했다. 그동안 이 대표가 거듭 영수회담을 제안해도 ‘피의자’와의 회담을 피해 왔던 윤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조정의 여지가 없다고 했던 의대 증원 문제에 대해 국립대 총장들의 ‘정원의 50~100% 범위 자율모집’ 건의를 수용하는 변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치적 파장이 큰 ‘채 상병 특검법’이나 ‘김건희 여사 특검법’까지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일단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달라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이나 방법의 변화만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부정적인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역부족이다. 단지 기술적인 변화를 넘어선 국정 노선의 변화와 쇄신이 본령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양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를 역행시킨다는 비판을 낳는 일방주의적 통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실 윤석열 정부는 국회에서 소수파인 힘이 약한 권력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권력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떠올리는 통치방식을 답습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성취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윤 대통령은 소통을 확대함과 아울러 귀를 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경청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둘째는 보수 우파 진영만의 대통령이 아닌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계속된 편 가르기 진영 대결의 정치를 비판하며 들어섰던 윤석열 정부였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집권하자 문재인 정부 이상으로 진영을 갈라치기 하는 국정 운영을 해왔다. 용산 대통령실을 비롯한 정부 부처들에는 과거 보수정부 시절의 ‘그때 그 사람’들만이 중용됐을 뿐, 진영을 넘어선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하는 탕평 인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광경은 윤석열 정부가 새로운 보수 정부가 되리라는 기대를 진즉에 포기하게 만들었고,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퇴행적 낙인을 찍게 만들었다. 이제라도 윤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탈진영 선언을 하면서 국정의 편향된 노선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탕평’의 소리를 들을 만한 담대한 인적 쇄신이 없다면 윤 대통령이 다짐한 변화는 다시 한번 구두선에 그칠 위험이 크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입장 발표를 한 뒤 당사를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관련 입장 발표를 한 뒤 당사를 떠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비 윤’ 지도부 들어서는 것이 민심 따르는 길

용산 대통령실이야 윤 대통령의 손에 열쇠가 쥐어져 있다 해도, 국민의힘은 집단지성을 통해 당면한 위기를 풀어가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지금은 용산이 국민의힘에 개입할 상황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국민의힘이 ‘윤심’에 의존할 이유도 없고, 그랬다가는 민심의 역풍을 맞게 된다. 결국 국민의힘의 살 길은 자신들이 알아서 찾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한때 국민의힘을 수렁에서 건질 구세주처럼 여겨졌던 한 전 위원장은 패장이 돼 일단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를 대신할 리더를 찾기 어려운 대안 부재의 상황이 국민의힘이 처한 현실이다. 이번 총선 결과 국민의힘은 다시 영남당의 색채가 강해졌다. 지역구 선거에서의 당선자 분포가 영남에 과도하게 편중된 결과는 국민의힘이 수도권 민심에 부합하는 변화를 모색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그래도 국민의힘이 2026년의 지방선거와 2027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재기할 생각을 한다면 수도권 민심을 바로미터로 삼아 변화와 쇄신을 모색하는 길밖에 없다. 영남의 지역정서에 맞춰 강경 보수 이념을 앞세우는 정당이 됐다가는 앞으로의 선거에서도 연전연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민의힘이 수도권에서 완패하는 가운데서도 ‘비윤’이라는 이유로 변방으로 내몰려왔던 안철수 의원, 나경원 전 의원, 심지어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같은 인물들은 생환을 했다는 사실이다. 유권자들은 누가 윤 대통령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왔고 그래서 주변으로 내몰렸던가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민심에 맞춰 지도부를 구성하고 당을 운영하는 것이 활로가 된다. 당분간이야 윤재옥 원내대표가 당을 이끌지만 곧 새 원내대표가 선출되고 나면 공룡 야당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가급적 빨리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를 선출하고 재창당에 버금가는 변화를 이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비 윤’으로 낙인찍혀 별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당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를 맡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비 윤’ 지도부가 민심을 따르는 길이다. 민심이 윤 대통령을 심판했는데 다시 윤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을 당의 얼굴로 내세우는 것은 민심을 거부하는 일이다.

다만 총선을 치르면서 윤 대통령과 관계가 불편해진 것으로 알려진 한 전 위원장은 아직은 재등판의 시기가 아닐 것이다. 총선에서의 역대급 참패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이 그리 가벼운 것도 아니고, 한 전 위원장 본인도 큰 정치인이 되려면 아직은 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아직은 당사자들의 당 대표 경선 출마여부가 유동적이라 구체적인 거명을 하기는 이르지만, ‘비 윤’이 중심이 돼 ‘친 윤’까지 껴안는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국민의힘이 이뤄야 할 변화 역시도 단지 당의 얼굴을 누구로 하느냐 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당 대표가 누가 되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당의 체질 개선이다. 낡고 구시대적인 사고에 갇혀 변화하는 시대 환경을 쫓아가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뒤로 물러서고 새로운 사고를 가진 합리적인 정치인들이 중심에 서야 국민의힘의 오랜 숙원인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 수도권에서 어렵게 당선된 조정훈, 김재섭 같은 젊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방향을 선도할 리더나 중진들이 당내에 희소한 현실이다. 특히 국민의힘 당선자의 대다수가 영남지역에 편중된 결과는 국민의힘을 영남당으로 고착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을 위험이 크다. 한동훈이든 나경원이든 안철수든 장차 당을 이끄는 사람이 누가 되든 간에 영남권 의원들을 평정할 만한 정치적 힘이 없는 상태에서는 당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국민의힘 김재섭 당선인과 김용태 당선인이 2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자총회에서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 김재섭 당선인과 김용태 당선인이 2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자총회에서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합리적인 보수 정치인들이 변화의 중심에 서야

보수 우파 정치에 대한 지지층의 구조와 질을 변화시키는 일도 보수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중요한 숙제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민심 이반을 낳았던 원인 가운데는 강성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추는 강경노선을 밀어붙였던 이유도 컸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른 문재인 집권 세력은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강성 지지층에 갇혀 5년 동안 적폐 청산의 구호만 외치다가 끝났다.

정작 중요한 부동산 정책, 소득정책, 시장정책 같은 민생문제들은 난맥 상태였음에도 집권 세력은 응징의 정치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정치세력에 대한 팬덤층은 고정적인 지지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필요하기도 하지만, 자칫 그 정치 세력으로 하여금 정념의 과잉 상태에서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드는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그동안 민주당에서 이재명 대표를 지지하던 ‘개딸’ 정치의 폐해가 드러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환경은 보수정치라고 해서 다르지 않음이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도 드러났다. 보수 우파 진영의 스피커들은 한결같이 강성 유튜버들이었고,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는 보수주의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수십만 혹은 백만이 넘는 구독자들을 보유한 강성 유튜버들은 국민의힘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니 감당해서는 안 될 요구들을 쏟아냈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보수 우파의 강성 인물들의 공천을 요구했는데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한동훈을 ‘좌파’로 매도하는데 일제히 나섰다. 국민의힘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한 전 위원장이 ‘이종섭 귀국‧황상무 사퇴’라는 상식적인 수습책을 내놓자 ‘좌파에 휘둘리는 한동훈’이라는 비난을 쏟아내며 보수 우파층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강성 유튜버들은 보수 우파 진영의 강성 지지자들에게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강성 유튜버들의 이 같은 극단적 대응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보수 우파층의 분열과 이완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나마 막판에 가서 국민의힘이 10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 읍소가 나오자 투표장으로 가서 간신히 100석을 넘겼을 뿐이다.

국민의힘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며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들 보수 우파층의 사고는 사실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중도층 혹은 중도 확장 노선에 대한 이들의 태도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총선이 보수정당의 궤멸적 패배로 끝났는데도 보수 우파들은 “중도는 빨갱이”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한다. 선거의 ABC를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들이다.

보수든 진보든 자기들의 고정적 지지층 30%만 갖고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투표할 정당과 후보를 결정하는 캐스팅 보트인 중도층의 지지를 얻어야 승리가 가능함은 불문가지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당한 참패는 중도층이 대거 정권 심판을 선택한 데 따른 결과다. 그러면 어쩌다 보수 우파가 중도층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는가를 성찰해야지, 중도를 빨갱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거의 자멸에 가까운 모습이다.

보수 우파 정치세력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환경은 합리적이고 새로운 보수정치 세력의 출현을 갈망하는 평범한 보수층의 요구와도 상충된다. 우리 사회의 보수층이 모두 강성 이념의 소유자들은 아니다. 개인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 자기 집 하나 가졌다고 국가로부터 징벌적인 세금폭탄을 맞지 않는 사회, 분노와 복수의 큰 목소리가 사회를 뒤흔들지 않는 사회를 원하는 보수층이 많다. 그런 보수층 가운데서도 윤 대통령이 보였던 단순하고 일방적인 국정운영에 고개를 젓고 등 돌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윤석열이 보수를 말아 먹었다’는 탄식이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 결과가 여당의 총선 참패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 우파 진영 내에서 어떻게 해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목소리들이 영향력을 갖고 확산될 수 있을까를 보수 우파 세력들은 고민해야 할 일이다. 분노의 정념만으로 나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핏발 선 눈으로 외치는 ‘좌파 궤멸’의 구호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질려버린 민심을 더 멀리 가게 만들 뿐이다.

보수 정치세력이 강성 팬덤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합리적인 보수의 길로 들어서는데도 윤 대통령이 해야 할 몫은 크다. 세간에는 윤 대통령이 극우 강성 유튜버들의 방송을 즐겨 본다는 얘기가 돈다. 여권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론한 얘기이니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에 대한 비판의 소리에는 귀를 닫은 대통령이 강성 유튜버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그러한 콘텐츠에는 국정에 요구되는 균형적 사고는 존재하지 않고 나라를 좌우의 이분법으로만 가르는 좁은 세계관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자신의 SNS에 ‘윤 대통령이 4월 총선에서 확인된 민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최소 열가지 사항'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여기서 조 대표는 첫째로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8개 법안 재발의 시 수용을 꼽으며 김건희 특검법, 이태원 특별법,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간호법, 방송3법 등을 거론했다. 그런데 열거된 내용 가운데 9번이 눈길을 끈다. 조 대표는 ’윤 대통령 및 김건희 씨의 천공 등 무속인, 극우 유튜버의 유튜브 방송 시청 중단‘을 거론했다. 물론 ‘천공’과 관련된 소문은 야당의 선동에 의해 과장된 내용인 것으로 여러 차례 확인됐지만, 대통령이 극우 유튜버들의 방송을 시청한다는 애기는 워낙 파다했던 터라 무시하고 지나가기만은 어렵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부터 극우 성향의 강성 우파들과는 선을 긋고 국정을 운영하는 변신이 요구된다.

어째서 윤 대통령 주변에는 이념적 성격이 강한 우파 인사들만 둘러싸고 있고, 언제나 그들의 얘기만 들을까 하는 것은 지난 2년간 계속된 의문이다. 국민 가운데 보수 우파는 30% 정도일 것이고, 나머지 70%의 국민들은 중도나 진보 등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그 70%의 생각과 의견을 경청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자기 편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용산 대통령실로 초대해 국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경청하고 쓴소리까지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언제나 자기 얘기만 장황하게 하고 다른 의견을 말할 사람들과는 아예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항의라도 하면 ‘입틀막’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가 윤 대통령에게 ‘불통’의 낙인을 찍은 것이다.

22대 총선에서 윤석열 집권 세력이 최악의 참패를 당했던 데는 물론 윤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나 국민의힘 또한 집권 여당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용산과 국민의힘에게는 같으면서도 또 다른 숙제들이 각자에게 부여된다. ‘박근혜 탄핵’으로 궤멸당했던 보수정치 세력이 다시 민심을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기까지 오랜 각고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집권 2년 만에 그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보수정치로서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게 됐다. 하지만 돌아보면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었던 것이고, 자업자득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국민 가운데 최소 3분의 1 이상이 자신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회인데 정작 보수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상황은 우리 정치의 불행이다. 보수는 다시 길을 잃었다. 다시 제 길을 찾을 때까지는 진통과 혼돈의 시간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든 보수정치도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일이 단지 보수층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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