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걸어들어 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걸어들어 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끝내 불발됐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5~16일 중국 방문 기간 동안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과 가까운 흑룡강성 하얼빈까지 갔다가 귀국했다. 그가 중국 다음으로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던 외신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푸틴 대통령이 5선 임기 개시 후 첫 방문국으로 중국을 택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도발한 이후 그의 국제적인 입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중국 말고는 북한조차 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7월 집권 첫 해에 북한을 방문,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해방 후 소련 시절과 러시아 시절을 통틀어 북한을 방문한 최고 지도자는 푸틴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1969년 소연방 최고회의 의장인 포드고르니가 방북한 적이 있지만 그는 실권자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의 등장에 앞서 상징적인 국가원수였을 따름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 중에서 누구도 북한에 간 적은 없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체제가 들어선 뒤조차 고르바초프와 옐친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했지만 북한은 가지 않았다. 푸틴이 이번에 갔더라면 24년 만의 재방북하는 러시아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소련과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들이 북한을 가지 않은 것은 해방 후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에 온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2년 12월 한국전쟁 중에 대통령 당선자로 한국에 온 것을 시작으로 역대 미국의 대통령은 케네디와 닉슨을 제외하고 재임 중 모두 한 번 이상 한국을 방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세 번씩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의 대통령은 훨씬 자주 미국을 방문했다. 뉴욕의 유엔총회 참석은 연례행사다. 윤석열 대통령만 해도 취임 후 2년 동안 국빈 방문을 포함 5번이나 미국을 찾아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외에도 주요 20개국(G20) 회의 등 빈번한 국제회의장이 정상회담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한미 정상 간의 만남에선 안보와 함께 경제문제가 주요 의제로 오른다.

푸틴 대통령이 중국까지 왔다가 평양에 방문하지 않은 것은 미국 대통령이 일본만 왔다가 한국에 안 오고 간 것과 마찬가지다. 푸틴 대통령의 방문을 학수고대했을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선 분통이 터질 일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고전하는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한 생각을 하면 배신감을 억누르기 힘들 것 같다.

이런 김정은 위원장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의 귀국 직후인 18일 크렘린궁 대변인을 통해 북한 방문 준비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 푸틴 대통령이 코즐로프 천연자원부 장관으로부터 북·러 교류 현황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고도 전했다. 완전한 뒷북이다.

작년 9월 김정은 위원장이 러시아 연해주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을 때 푸틴 대통령은 그의 방북 초청을 수락했었고, 쇼이구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 라브로프 외무장관, 나리시킨 대외정보국장 등 러시아 고위 관리들이 잇달아 북한을 방문했다.

지난 1월 북한의 최선희 외교부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도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일정 조율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방북 불발은 단순히 준비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순 없다. 좀 더 복합적인 상황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선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선 북한 방문이 무기 지원에 대한 보은의 방문으로 비쳐지는 것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무기 지원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나,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북한제 포탄들이 증거품으로 속속 발견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의 환영식단에 나란히 서서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를 외치는 모습은 두 나라의 무력적 협력관계를 증명하는 또 다른 장면으로 각인될 것이고, 두 나라에 대한 유엔의 제재 사유를 추가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북한제 포탄 중에 불발탄이 많아 전투력에 별 도움이 안 됐다는 얘기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받아쓰게 되면 북한으로부터 공장의 증설이나 기술이전과 같은 투자 요구를 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런 무기적 협업 관계는 서방으로부터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등 핵능력 고도화를 돕는다는 의심을 사기에 십상이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더라도 러시아가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북한으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명색이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나라로선 수치스런 일이다. 과거 소련은 세계를 반분한 공산권의 맹주였고, 북한의 김일성에게 무기와 자금을 줘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서 북한에 가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무기 지원의 대가를 충분히 제공했다는 점이다. 북한에 식량과 원유 및 가스 등을 제공했고, 러시아 관광객을 보내는 등 북한 경제에 숨통을 터준 것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양해를 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 불발에는 중국의 입김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으로선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긴밀해지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주요 2개국(G2)의 위상을 갖고 있는 중국은 미국과 적대하는 러시아나 북한과는 입장이 다르다.

중국이 러시아나 북한과 밀착했다가는 미국과 우럽연합(EU) 국가들로부터 제재 대상이 된다. 중국의 최대 교역국인 이들 나라로부터 제재를 당하는 것은 중국 경제에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이다. 시 주석으로선 두 나라 사이에 억지로 끌려들어가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푸틴 대통령의 방북을 말렸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크렘린궁이 푸틴 대통령의 조기 방북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정황들로 인해 실행 여부는 미지수이다. 최근 발생한 이란 대통령의 헬리콥터 추락 사망사건이 푸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이나 시 주석이 북한과 거리를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과의 물질적 거래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로선 북한은 얻을 것도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패권 경쟁에서 북한을 이용물로 삼을 뿐이지 북한의 민생 개선에는 관심이 없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기 덕분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등 주변 강대국 국가원수와 회담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새겨봐야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북 불발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강대국 외교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시 주석에게 당한 화풀이를 한국에 할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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