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판이 열린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법정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5월 16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판이 열린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법정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뉴욕 맨해튼 형사지법에서 34개 중죄 혐의에 대해 12명의 배심원 전원일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미국 역사에서 치욕의 정치인으로 기록되게 됐다. 그의 치욕의 역사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줄줄이 따라붙는다. 그 ‘최초’의 기록은 재임 중에서부터 시작됐고, 퇴임 후에 더 화려해졌다.

그는 재임 중에도 하원에서 두 번씩이나 탄핵 소추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선거가 조작됐다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고 지지자들을 선동해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 사상 전무후무한 의사당 폭동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됐다.

미국 대선은 대개 선거 개표가 완료되기 전 패자는 결과를 승복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결과에 이의가 있더라도 법원의 판단에 따랐다. 그는 자신이 제기한 모든 이의가 법원에서 기각됐음에도 인정하지 않았고, 4년이 지난 현재까지 ‘조작된 선거’로 인한 ‘도둑맞은 대통령’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 이·취임식에 전·현직 대통령이 나란히 참석하는 전통을 깬 전임 대통령도 그가 최초였음은 물론이다.

퇴임 후의 ‘최초’ 행렬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이번 형사사건의 중죄 판결이다. 이번 판결 외에 선거법 위반, 국가기밀 유출 등의 형사 기소된 사건이 3건이 더 있다. 4건이나 되는 형사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전직 대통령도 그가 유일하다.

이혼 경력만으로도 대통령 후보 결격사유라고 했던 미국에서 3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후보로 2016년 선거에서 당선된 것도 그가 최초다. 민주·공화당을 막론하고 섹스 스캔들로 대선에서 낙마한 후보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트럼프가 후보로 나서자 그와의 섹스 스캔들을 폭로한 여성이 무려 18명이나 됐으나 이를 모두 부인하고 선거에서 이겼던 것이다.

그 18명 중에서 빠져 있던 포르노 스타 스토미 대니얼스와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 카렌 맥두걸이라는 두 명의 여성과의 불륜 사건이 뒤늦게 들통 나 유죄평결의 원인이 됐으니 그로서는 천려일실의 회한이 남을 것 같다. 이 중 직접적인 재판 대상이었던 스토미 대니얼스 사건은 트럼프의 ‘해결사’(Fixer)이자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헨이 대선 직전에 대니얼스의 폭로 정보를 입수하고 입막음용으로 13만 달러를 지급한 사실의 유무를 가리는 재판이었다.

트럼프는 정사 자체를 부인했고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코헨에게 지급한 돈도 변호사 비용으로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정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대니얼스는 트럼프와의 정사 장면을 너무 생생하게 묘사해 판사가 진술을 제지시킬 정도였다. 이번 재판에서는 트럼프가 사업가였을 때 친구와 나눴다는 ‘섹스 관련 대화’(Access Hollywood) 녹취록도 배심원들에게 공개됐는데, 녹취록에서 그는 맘에 드는 여성을 제압하려거든 여성의 생식기를 움켜잡으라고 말했다.

트럼프만큼 미국인들에게 요란하게 성지식(?)을 주지시키는 데 기여한 대통령도 없을 것 같다. 앞서 그런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빌 클린턴을 들 수 있지만, 뒷날 탄핵소추의 원인이 됐던 백악관 인턴사원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도 ‘부적절한 행위’(오럴섹스)라고만 밝혔을 뿐 이번처럼 구체적인 행위묘사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재판 중에 판사와 검사를 겁박해 ‘재갈명령’(Gag Order)의 적용을 받아 1회당 1000달러씩 10번의 위반으로 1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된 전직 대통령도 그가 최초이고, 재판 후로도 ‘부패한 판사와 검사’에 의한 조작된 재판이라고 선거 불복 때 써먹은 ‘조작’을 다시 쓰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판사의 최종 선고는 오는 7월 11일로 예정돼 있다.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인지, 투옥될 것인지가 그날 결정된다. 그가 대선의 유력한 후보라는 점, 78세의 고령이라는 점, 형사범으로는 전과가 없다는 점에서 구속은 면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그가 재판 결과에 대해 근거 없는 음모론을 멈추지 않는 정황이라 징역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죄판결로 그는 출마 의지가 꺾이기는커녕 선거모금액이 더 쏟아진다고 의기양양이다. 그는 11월의 대선이 자신의 유무죄를 가리는 진정한 심판이라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대타자가 없는 공화당 내에서도 후보 교체의 목소리보다는 지지의 목소리가 크다. 재선에서 낙선한 뒤 재출마를 시도한 대통령도 그가 최초이고, 임기 하나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당선되면 재선 금지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3연임을 하겠다고 지레부터 떠벌리는 것도 그가 최초다.

그가 집행유예 출마든 옥중 출마든 그것 또한 미국 정치에서 희귀한 일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재임 전의 사건으로 유죄 판결된 대통령이 재임 중에는 형사 소추되지 않는 헌법상의 특권에 의해 집무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형사범 신세로 어떻게 세계의 지도자로 행세할 것인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운명이다. 트럼프 재판 결과에 대해 이미 중국 정부는 ‘썩어빠진(Rotten) 정치제도’라고 한껏 조롱했다.

미국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적인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트럼프의 2020년 선거 결과 불복에 따른 2021년 1월 6일의 의사당 난동 사건으로 세계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큰 회의를 갖게 됐고, 장기 집권체제를 구축하던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는 심정적 안도감을 제공했다.

시진핑과 푸틴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열등감을 벗고 이제는 자국의 정치제도가 미국보다 낫다고 강변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트럼프의 선거 구호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가 무색해질 판이다. 그의 ‘최초’ 기록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워싱턴의 의회 출신이거나 연방 또는 지방정부 관리, 변호사, 군인 등의 공직자나 하는 걸로 돼 있던 역대 대통령 중 그는 최초의 민간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었다.

‘협상의 달인’을 자처했던 그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협상을 통해서 개방으로 이끌 수 있다는 과잉 자신감으로 2018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듬해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2차 회담까지 열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하노이 노딜로 미·북 간의 불신만 심화시킨 측면도 있으나, 미·북회담은 남북분단 이후 73년 만에 최초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그의 재선을 바라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김정은과 함께 한반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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