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워싱턴DC 본부 건물 전경. 사진=연합뉴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워싱턴DC 본부 건물 전경. 사진=연합뉴스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회의에서 지난 6일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ECB는 지난해 9월부터 기준금리를 4.5%로 유지했으나 이번에 0.25%포인트를 내린 것이다. 이로써 고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진정한 기축통화는 달러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의지를 거슬리면 자금 이탈 등 타격이 불가피하다. 아직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고 있는데 금리를 내리면 늪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CB가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은 유럽의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로존 경제성장률은 0.4%에 불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성장률을 0.8%로 전망했지만, 이는 미국 전망치(2.7%)보다 크게 뒤지는 것이다. 유럽 경제의 기관차인 독일은 지난해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0.3% 역성장했다.

올해 성장률도 0.2%로 전망돼 기록적으로 부진하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시행된 대규모 지원 정책으로 상품 수요가 반등하면서 혜택을 보았으나 그것이 마무리되자 오히려 깊은 골짜기에 빠진 것이다.

지난달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2.6%로 목표치인 2%와 거리가 있다. 서비스 물가가 4.1% 올라 인플레이션을 주도하고 있고, 내림세이던 에너지 부문도 0.3%로 반등해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기침체는 ECB를 금리 인하라는 모험의 길로 몰고 있다.

미국의 통화정책 기조에서 벗어나는 지역은 유로존만이 아니다. 지난 3월 스위스가 기준금리를 1.75%에서 1.5%로 낮추며 반기를 들었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지정학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산악지형과 호수 덕분에 수력발전이 풍부하며 발전사들이 국영기업이라 에너지 가격이 안정적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1.4%로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지난달에는 스웨덴이 기준금리를 4.0%에서 3.75%로 낮춰 인하 행렬에 동참했다. 스웨덴의 경우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3.9%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금융기관의 부동산대출채권이 부실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스웨덴은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인 2017년부터 -0.5%라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했는데, 이는 부동산 투기를 불러왔고 가계부채를 급증시켰다. 그러다 지난해 4월부터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면서 심각한 진통이 따랐다. 1990년대에도 비슷한 위기를 겪은 바 있으므로 금리 인하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반대로 일본은 지난 3월 기준금리를 -0.1%에서 0%로 인상했다. 2007년 2월 이후 17년만의 인상이라고 한다. 일본의 지난 4월 전년 동기 대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2.5%로 지난해 1월의 4.3%에서 낮아지는 추세다. 일본은 오랫동안 디플레이션으로 고생하던 나라라 저금리와 양적완화로 물가상승을 시도했다. 지금의 인플레이션 국면은 금리 인상의 명분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낮은 금리와 미국과의 격차로 엔화 약세는 기록적이며 수입 물가 상승으로 국민들은 생활고를 겪고 있다. 국가 부채와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량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따라서 과도하게 완화적인 통화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발을 뗄 수밖에 없다.

여러 나라가 나름대로의 사정에 따라 금리 인상을 도모하고 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2022년 3월부터 금리를 인상해 현재 5.5%를 유지하고 있다.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자국 입장이 우선이며 다른 나라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미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4%로, 2022년 6월 9.1%의 고점에 비해 많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정한 목표치 2%를 훨씬 초과한다. 서비스 물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고 실질소득이 하락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다. 미국 대선의 중요한 이슈도 인플레이션이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금리를 내릴 수 없다.

인플레이션의 주 요인이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이고, 일본과 우리나라는 강달러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이지만 미국은 매우 다르다. 코로나19에 대응한 대규모 재난지원금과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의 투자를 위한 보조금 지급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연소득 7만 5000달러(약 1억 294만원) 이하 국민에게 1인당 1200달러(약 165만원)의 재난지원금을 지원했다. 이는 국민의 96.3%에 해당하며 사실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 지원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가구당이 아니라 인당 지원이므로 그 규모는 대단한 것이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경기진작을 위한 재정지출이 따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이미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고 미국 각지에서는 공장 건설이 활발하다. 기업의 자체 투자금과 더불어 정부의 보조금은 제조업 부흥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이름과는 달리 인플레이션을 촉진하고 있다.

미국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감세 이후 재정적자가 더 심화돼 국채를 찍어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올해 미국 정부의 이자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3.1%로 국방 예산(3.0%)을 초과할 것이다.

이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금리를 낮출 필요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미국인의 저축 감소에 따라 소비가 둔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섣불리 금리를 내리면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것이다.

미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재정지출을 줄이면 경기가 위축될 것이다. 금리를 내리면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될 것이다. 따라서 재정지출도 늘리면서 금리도 높게 유지하는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다. 대선 국면으로 인해 지금의 상황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수출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금융 시장의 대외 개방으로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미국이 완강하게 고금리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단독으로 금리를 내리면 환율은 더 올라갈 것이고 해외 자금의 이탈 압력이 높아질 것이다. 지금도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2%에 달해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금리를 낮추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 심리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부동산과 관련된 가계·기업 부채가 높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지금은 옥석을 가려 신속하게 부채 정리를 해야 할 시점이며 거꾸로 부채를 늘리고 필요한 구조조정을 지연할 때가 아니다.

각국은 자국 사정에 따라 금리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미국의 통화정책 흐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섣부른 금리 인하가 아니라 과도하게 팽창한 부채를 줄이면서 자금이 생산적인 분야로 잘 흘러갈 수 있도록 경제의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다.

정인호 객원기자 프로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 경제학 박사 ▲KT경제경영연구소 IT 정책연구 담당(상무보) ▲KT그룹 컨설팅지원실 이사 ▲건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낸 경제 및 IT 정책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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