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한자 발음기호”라는 독학사 교재…고의일까, 실수일까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주간한국 송철호 기자] 2021년 가을, 한 출판사가 내놓은 독학사 교양 국어 교재에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기호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내용이 담긴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독학사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학위취득시험으로 대학교 검정고시의 일종이다.

이 논란은 공교롭게도 그 해 10월 9일 ‘한글날’ 다음 날에 한 누리꾼이 “독학사 교재에서 훈민정음에 관한 이상한 내용을 봤다”는 글을 특정 누리집(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면서 시작됐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결국 이 출판사는 해당 교재의 판매를 즉시 중단하고 재고 도서는 전량 폐기하겠다며 사과문을 올렸다. 이 교재로 학습 중인 독자에게는 잘못된 내용을 수정한 교재로 무상 교환 및 환불해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명백히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출판사의 비교적 빠른 사과와 조치가 있었지만 당시 국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훈민정음을 가지고 국어 교재에 이런 내용으로 실수를 할 수가 있느냐”, “중국 동북공정의 일환 아니냐”, “출판사가 내용 검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정부에서는 이런 왜곡을 거를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는 것이냐”며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다.

독학사 교재 집필자 꽁꽁 숨겨
잘못 있지만 관리·감독은 불가?

당시 훈민정음과 관련해 잘못된 내용을 담은 독학사 교재는 ‘훈민정음과 한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내용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주로 큰 논란이 됐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기호”라는 항목이다. 세종실록 곳곳에 담겨 있는 백성을 위한 세종의 고민을 완전히 무시한 내용이다.

특히 훈민정음은 서문에서 창제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이라는 명칭부터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조선에서 쓰는 말이 중국에서 쓰는 말과 달라 한자로는 통하지 않으니 한자·한문을 쓰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새로 문자를 만들었다는 목적을 서문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교재는 또 “훈민정음은 언문(한글)으로 만들었다”며 “지금 한글이라 부르는 것은 언문이고, 언문은 최소 고려 때부터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훈민정음은 중국에 반포했다”며 “이두를 대체해 사용하는 것, 한문서적을 언해하는 것,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 등의 세 가지 정책은 모두 중국에서 시행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은 당시 이에 대해 “민간 출판사에서 출판한 특정 교재의 역사 왜곡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면서도 “민간 출판사를 관리·감독할 권한이 없고, 다만 신고 내용이 심각해 해당 출판사에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고 처리 경과를 확인하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정부도 “황당한 내용이지만 법적으로 미리 검토하고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렇게 어느 한순간 발생한 오류 정도로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교재는 2021년 누적 판매가 25만부나 될 정도니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관련 교육기관과 정부가 민간 출판사라는 이유로 관리 또는 감독을 할 권한이 없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유사한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파장이 커졌다.

재발 방지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정작 누가 집필했는지, 또 이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지는지에 대한 사실이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해당 출판사가 비교적 빠른 사과를 했고 판매 중단과 재고 도서 전량 폐기 등의 조치를 했다는 것은 명백한 잘못을 인정한 것인데, 이 논란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집필자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이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집필은 해당 교재의 독학학위연구소에서 했다고 하는데, 출판사는 일반 전화번호조차 알려주지 않아 누가 집필했는지 알 수 없었다”며 “두 번이나 전화해서 확인했지만 출판사는 그 교재를 누가 집필했는지 자신들은 알 수 없고 연락처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 누리꾼이 “교재 내용이 이상하다”며 올린 내용의 일부. (사진=해당 누리집 게시판)
한 누리꾼이 “교재 내용이 이상하다”며 올린 내용의 일부. (사진=해당 누리집 게시판)

동북공정식 주장 옹호한 역사 왜곡
한자 발음기호설, 소수설이지만 강력

이 독학사 교재 논란이 더 심각한 것은 훈민정음에 대한 역사 왜곡도 부족해 중국에 반포했다는 동북공정식 주장까지 보태졌다는 데 있다.

실제로 논란 당시에도 “중국의 동북공정식 개입이 아니냐”는 의문이 크게 불거지기도 했다. 이에 당시 해당 출판사를 국민신문고에 신고한 누리꾼도 동북공정을 의심하고 외교부에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해당 의혹에 대한 물증이 있었다면 정부와 관련 기관이 관리·감독할 권한이 없다며 발을 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외교부에 신고된 민원도 독학학위제를 담당하는 교육부 산하 기관인 국가평생교육진흥원으로 이전돼 처리됐다.

다만 학계의 소수 의견이 독학사 교재에 반영됐다는 목소리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슬옹 원장은 “훈민정음의 한자음 발음기호설은 훈민정음을 다루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의견이지만 그 뿌리는 길고 강력하다”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서울대 출신 학자들인 이숭녕·강길운·정광 교수가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에 발표된 ‘한글, 우리말과 글의 빛이 되다’라는 최경봉 원광대학교 교수의 연구 보고서에도 훈민정음의 한자음 발음기호와 관련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보고서는 현재 문화재청 누리집에도 올라와 있는데 최 교수는 정광 교수의 제자로 알려졌다.

최 교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자가 동아시아의 보편문자이던 시절, 선진 문화를 한자로 받아들이며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신들의 모어까지 한자로 표기했다. 그러나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자신들의 모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었다. 나라의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새 문자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 교수는 이 보고서에 “한글 창제 이전에 이미 여진족의 나라 금, 몽고족의 나라 원이 자신들의 말과 중국 한자음을 표기할 표음문자를 만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며 “세종이 음소문자를 만들되, 정밀한 음소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을 담았다.

김 원장은 “이런 잘못된 주장이 나온 이유는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제대로 보지 않고 한자음 관련 기록만을 편향적으로 주목해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라며 “더욱이 창제 목적과 실제 쓰임새를 마구 뒤섞어 창제의 진정성을 흐리고 있는데, 이를 테면 통학용으로 산 자전거를 시장에 장 보러 가는 데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장보기용으로 산 것이라고 우기는 식”이라고 덧붙였다.

김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한자음 발음 기호론자들은 세종이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대략 두 달 뒤인 1444년 2월 16일 중국의 한자 발음책인 운서의 한자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적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을 사례로 들고 있다. 또한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1448년 ‘동국정운’이라는 우리나라의 표준한자음 사전을 펴낸 일을 핵심 근거로 내세웠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해례본과 세종실록 기록 부정하는 셈
“한자음 표기설은 용도 중 하나일 뿐”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인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서문’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궁극적으로 온 백성의 편안한 문자 생활을 위해 만들었다. 특히 해례본에서는 한글 표기 낱말을 124개나 예로 들고 있는데 모두 한자어가 아닌 토박이말이다.

만일 한자음 발음기호가 목적이었다면 토박이말이 아닌 15세기 양반이 쓰던 한자말을 예로 들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한자음 발음기호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러한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과 관련 세종실록 기록이 모두 허위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훈민정음에는 “실제 이렇게 쓰라”며 124개 낱말이 예시로 나온다. 예시 중 ‘종이’, ‘벼루’, ‘부엉이’ 등이 모두 우리 고유말이다. 한자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실제 예시도 한자로 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동국정운의 사례도 한자 문화권이던 조선에서 한자음 표기가 훈민정음이 쓰이던 용도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 의견이다.

김 원장은 “대학 졸업 학사 자격을 부여키 위한 매우 중요한 독학사 교재에 왜곡된 국어 지식, 특히 대한민국 문화 상징 1호인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기본 상식을 완전히 파괴한 지식을 담고 있다”며 “그 교재가 25만부나 팔릴 때까지 독학학위제를 담당하는 교육부의 국가평생교육진흥원과 관련 학회나 국어 교육계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허황된 학설에 휘둘리지 않도록 훈민정음의 역사적 진실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제대로 읽고 배우는 교육에 더욱 힘써 훈민정음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나눠야 한다”며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누구나 쉽게 제대로 적어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세종의 원대한 꿈이 담겨 있는 문자”라고 덧붙였다.

서울시 은평구청에서는 올해 1월 1일부터 전국 시군구 처음으로 ‘우리말’ 진흥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곳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소속으로 우리말 진흥에 앞장서고 있는 유민호 박사(고대(古代) 우리말 전공)는 독학사 교재 사태에 대해 “사막에서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유 박사는 “훈민정음의 한자음 발음기호설은 끊임없이 퍼질 수 있는 위험한 내용”이라며 “그나마 신기루는 직접 가보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 독학사 교재와 같은 논란은 진짜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600년 전으로 돌아가 창제자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끝을 내기 쉽지 않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망상과 환상을 퍼트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유 박사는 이어 “망상과 환상의 특징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그러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라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목적 자체를 건드린다는 점은 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통째로 건드리는 것이며 앞으로도 재발될 수 있는 사태라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학계가 이 불편한 진실을 묻어두거나 일개 실수로 치부하는 자세가 더 문제라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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