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한글 대체 가능한데...국한영문 혼용, 한자어 남용, 외래어·약어 사용

[주간한국 박철응 기자] '태풍 '링링'과 '타파' 등으로 인한 도복 피해' - 한자어 도복(倒伏)은 쓰러짐을 의미한다. 

'고열로 모돈 5마리가 폐사되었다' - 어미 돼지를 모돈으로 썼다. 

'전도 위험이 있는 가림막' - 전도(顚倒) 는 넘어짐을 의미한다. 

지난해 7월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제11회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 연수회에서 한 참석자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국어문화원연합회)
지난해 7월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제11회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 연수회에서 한 참석자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국어문화원연합회)

 

유리 공주대 교수 등 연구진이 2020년 발표한 '행정기관 보도 자료의 어휘 및 외국 문자 사용 실태 조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한 광역자치단체의 보도자료 1161건을 분석한 결과, 대체어(순화어)가 있는데도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가 쓰이거나 사전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임시 조어가 쓰이는 경우가 다수였다. 외국 문자가 직접 노출된 빈도는 4560회에 이르렀고, 월 평균 27.5%의 보도자료에서 소통을 어렵게 하는 어려운 낱말이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 언어에서 주로 보이는 국한영문의 혼용과 어려운 한자어의 남용, 과도한 약어나 유행어의 사용 등은 한글 문화를 어지럽히는 대표적 유형들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21년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의뢰를 받아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공공 언어에서 가장 개선이 필요한 항목으로 '낯선 한자어 등 어려운 단어'가 63%로 가장 많았다. 이어 '외국어 및 외래어'와 '복잡하고 길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각각 37.6%, 37.5%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요구조자', '환형유치처분' 등
어려운 공공언어로 스트레스

 

또 어려운 공공 언어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9점 척도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답답하고 불편함'이 6.0점이고 '피로감을 느낌' 5.9점, '당혹스러움' 5.7점, '위축됨' 5.4점, '불안하고 상실감을 느낌' 4.8점,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음' 4.4점 등이었다. 9점이 '매우 심하게 느낌'이고, 5점이 '보통'이다. 대체로 보통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셈이다. 

같은 해 경기도가 실시한 '공공언어 바르게 쓰기' 특정 감사 결과를 보더라도, 순화 대상 문서 1만 5467건 중 잘못 사용된 공공 언어로 한자어(53.1%), 외국어(23.5%), 로마자 및 한자(16.7%)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도민의 생활과 밀접한 교통, 주거, 안전 관련 업무 문서의 60%가량이 순화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 단어인데도 어려운 한자어나 불필요한 외국어를 사용해왔던 것이다. 한자어로는 통보(안내, 알림), 송부(보냄), 첨부(붙임)가 대표적이고, 외국어는 홈페이지(누리집), 매뉴얼(설명서, 안내서, 지침서) 등이 꼽혔다. 한자 '道'나 '까지'를 의미하는 '限'을 그대로 쓰거나, 로마자 AI(인공지능), DMZ(비무장지대) 등을 한글 병기 없이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자나 한자어 사용은 워낙 뿌리가 깊다보니 지속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의 2018년 '중앙행정기관 공공 언어 진단' 보고서를 보면,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닐 경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즐비하다.

각 기관별 보도자료를 분석한 것인데, 경찰청의 경우 요구조자, 형기차, 과료, 조도, 수권, 장구, 생안 등이, 국세청은 조세일실, 세적, 수증자, 안분계산, 미환류소득 등이 지적됐다. 대검찰청은 환형유치처분, 구료, 기화, 성본창설, 평성 등이 어려운 한자어 목록에 올랐고, 환경부의 경우 불투과율, 광투과, 전구물질, 세륜 등이, 농촌진흥청은 양수분, 열과, 적환무 등이 꼽혔다. 고용노동부의 어려운 한자어 목록에는 '신중년'(자신을 가꾸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젊게 생활하는 중년)이 오르기도 했다.

외국어 남용 사례는 더욱 광범위했다. 교육부만 놓고 보더라도 매뉴얼, 링크 서비스, 시뮬레이터, 마이스터고, 마이크임팩트스퀘어, 스포테인먼트 등 91개 외래어가 목록에 올랐다. 한글 정책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북트레일러, 커뮤니케이터, 슬로건, 엔트리, 러닝 타깃 등 82개 외래어가 지적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발광다이오드 등 산업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111개가 목록에 올랐다.

지자체의 구호가 영어로 된 사례도 많았다. 공주시의 'Hi-touch Gongju', 당진시의 'Energetic Dangjin', 보령시의 'VIVA Boryeong', 논산시의 'YESMIN', 부여군의 'Tradition BUYEO' 등이다. 정작 지역 주민들은 60% 이상이 구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문체부는 2020년 8월에 외국어 신어(새로 만들어져 사용되는 단어)와 관련된 국민 언어 수용도를 조사한 바 있다. 535개의 외국어 낱말을 놓고 의견을 물었는데, 평균 56.4%가 우리말로 바꿔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동의율이 높은 단어들을 보면 타운홀미팅, 웨비나, 크래시 헬멧, 프라임 레이트, 유니크 베뉴 등 생소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소셜미디어, 푸드트럭, 라이벌, 카테고리, 모델하우스 등 비교적 자주 접하는 단어들에 대해서는 그대로 쓰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76% "공공문서 작성 어려워"
개선시 경제적 효과 수천억 

국어기본법 14조의 공문서 작성 규정은 한글을 원칙으로 하되,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돼 있다. 병기를 어느정도는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공공 문서의 한자어 사용 등은 더욱 실질적인 어려움을 초래한다. 뉴스포스트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쉬운 우리말 공공 문서 사업 조사'를 보면, 설문조사 응답자의 67.2%가 공공 문서 작성시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문서로는 '종합소득세 등 세금 관련 문서'였으며 '등기 신청 등 부동산 관련 문서'가 뒤를 이었다. 

쉬운 우리말로 바꾼 개선안에 대해서는 선호도가 90% 안팎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사업자등록증의 '타가면적'을 '빌린 사업장 면적'으로, 취득세신고서의 '동거봉양'을 '(부모를) 모시다'로, 등기 신청서의 'E-form'을 '전자 양식'으로 바꾸는 식이다. 

공공 언어의 개선은 경제적 가치로도 이어진다. 현대경제연구원 분석을 보면 민원 서식 개선을 통한 시간과 비용 절감은 연간 1952억원(일반 국민 1248억원, 공무원 704억원)에 이른다. 정책 용어와 약관 및 계약서는 각각 753억원, 791억원으로 산출됐다. 이 뿐 아니라 공익적 가치, 즉 정확한 정보 제공, 정부 업무 효율성 증가, 국민 스트레스 해소 등이 연간 3375억원으로 분석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어려운 공공 언어로 인한) 모든 어려움이나 불편함은 쉬운 우리말을 사용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라며 "순화어에 대한 일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 판단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순화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보다는 공공 언어 개선 활동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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