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거’, ‘수류지’를 누가 이해?…일본식 언어·난해한 전문용어 고질적 남용

헌법재판소 내부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헌법재판소 내부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주간한국 송철호 기자] 헌법을 비롯해 민법·형법 등 법전 곳곳에는 사전이 없다면 뜻조차 알기 어려운 표현이 넘쳐난다. 판결문의 관행적인 표현도 일반인에게는 암호처럼 느껴진다.

일본식 언어의 잔재가 깊고 난해한 법조용어만 고집하는 고질적인 관습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 특정 직업에 대한 진입 장벽이 높을수록 이른바 ‘전문 용어’가 많아지기도 한다. 법조계와 의료계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난해한 법률 용어로 장벽을 친 법조계’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법조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법률 수요자인 일반인이 법률 용어를 접할 때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언어와 법률 용어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법조계부터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10년간 약 1200건 증가한 법령
법조계만으로 순화 작업 한계

사실 법률 용어 순화 작업은 1980년대부터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약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업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각종 법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이 순화 작업이 쉽지 않은 이유다.

법조계 관계자는 “일단 법전에 일본식 용어, 전문 용어, 차별 용어 등이 워낙 뿌리 깊게 남아 있고, 법조계 사람들도 오랜 세월 일상 언어처럼 사용해 왔던 법률 용어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다”며 “게다가 매년 새롭게 만들어지는 법령 수가 생각보다 방대하기 때문에 법조계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제처에 따르면 급속한 사회 변화를 겪어온 우리나라는 법령 수가 2012년 3929건에서 지난해 5월 기준 5194건으로 10년 사이 1200건 가까이 증가했다. 법령이 증가할수록 국민들은 필요한 법 규정을 찾고 확인하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법률 용어가 난해해 법의 내용을 빠르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고영회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는 “우리나라 법이 일본 민법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니 상당 부분 그대로 베껴온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법안들이 많다”며 “이러한 법안들을 접하는 보통 사람들은 거의 외계어 수준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고, 차라리 영어로 표현된 것이 더 이해하기 편하다는 한탄까지 할 정도”라고 지적했다.

고 변리사는 이어 “대표적으로 민법 제229조(수류의 변경)를 살펴보면 ‘구거 기타 수류지의 소유자는 대안의 토지가 타인의 소유인 때에는 그 수로나 수류의 폭을 변경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며 “일단 문장부터 어렵게 돼 있고, 특히 개울 또는 도랑의 뜻을 가진 ‘구거’, 아예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수류지’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이 밖에 수많은 법령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차별 용어도 문제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 대상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나 고정 관념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용어는 순화된 표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성차별적 용어’(자→자녀), ‘특정 직업군에 대해 부정적 느낌을 줄 수 있는 용어’(강사료→강의료, 강사의 강의료/파출부→가사도우미), ‘장애인을 비하하는 어감이 있는 용어’(불구자→신체장애인, 장애인/장애자→장애인/불구폐질→영구장애) 등이 대표적인 순화 사례다.

지금도 진행 중인 ‘법률 용어 순화’
법제처, 법무부와 협업…국회도 입법

정부도 법률 용어 순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최근 법제처는 민법, 상법, 형법 등 국민의 일상생활과 가장 가까운 기본법을 한글화하고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문장 구조를 알기 쉽게 쓰는 사업을 법무부와 협업해 추진하고 있다.

법제처에 따르면 그동안 64개 형법 조문, 38개 형사소송법 조문을 한글로 쉽고 명확하게 개정했고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기본법 조문의 정비안도 마련하고 있다. 형법을 예로 들면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있는 자’를 ‘위난을 피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식이다.

법제처 관계자는 “앞으로도 한자로 된 기본법의 한글화와 ‘궁박’, ‘제각’ 등의 일본식 표현을 순화해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기본법이 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라며 “법제처는 법령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도 법령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2025년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지능형 법령정보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플랫폼은 법령 용어가 아닌 일상 용어로도 법령 정보를 정확하게 검색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또 법제처는 ‘국민과 함께하는 법령안 새로 쓰기’ 국민참여단을 모집해 운영하고 있다. 국민참여단에 선정되면 입법예고안·현행 법령 속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문장에 대해 개선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차별적·구시대적 법률 용어에 대한 대체 용어도 제시가 가능하다. 2019년부터 시작된 국민참여단을 통해 약 650개의 의견이 실제로 입법예고안에 반영됐다.

국회도 법률 용어 순화 작업에 나선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발의 당시 미래통합당 소속)은 2020년 7월 ‘난해한 법률 용어를 정비한 형법과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 했다. 같은 해 11월 본회의에서 원안이 가결됐고 정부 이송 후 12월 공포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형법과 형사소송법 법률 용어를 알기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내용들이 골자다.

윤 의원은 “법전을 법조인만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국민에게 이를 지키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딱딱하고 어려운 법률 용어를 친근한 우리말로 바꿔 국민의 법에 대한 접근성과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만 무소속 국회의원(발의 당시 더불어민주당 소속)도 지난해 12월 한국 법률에 남아있는 일본식 용어·한자 순화를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토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이 개정안은 국회 각 상임위원회가 법률안 심사시 일본식 용어·한자의 순화에 관해 국회사무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해 보다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은 “법률 용어 개선은 필요하지만 개별법 발의로는 한계가 있다”며 “어떤 법이든 심사 단계에서 일본식 용어나 한자 순화가 필요한 부분이 발견되면 그때그때 교정했을 때 보다 효율적으로 용어 순화가 이뤄지고 동시에 단순 용어 교체로 인한 입법력 낭비도 개선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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