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헌 둘러싼 정치권 갈등으로 '허송세월'...헌재의 국어기본법 합헌 판결에도 손 못대

한글단체 및 시민단체 53곳으로 구성된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가 지난 2018년 3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쉬운 헌법 개정을 홍보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한글단체 및 시민단체 53곳으로 구성된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가 지난 2018년 3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쉬운 헌법 개정을 홍보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정치권에서는 다시 개헌 논의가 불붙고 있다. 헌법 전문에 5월 정신을 수록하는 문제를 두고 개헌 방법과 내용에 대해 여야 이견차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개헌 논의가 진행될 때마다 국한문 혼용인 헌법을 한글 전용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비교적 관심권에서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다른 법은 법제처에서 2006년부터 추진해온 '알기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으로 어려운 한자어, 일본식 용어 등을 쉬운 한글로 대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헌법은 이런 작업을 거의 거치지 못했다. 그나마 일반 법령은 국회 입법을 통해 법령을 고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개헌은 국회 전체의석의 3분의 2 이상 동의와 국민투표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국한문 혼용체인 대한민국 헌법
일본식 표현도 아직 잔재로 남아

1948년 유진오의 제헌헌법 초고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1948년 유진오의 제헌헌법 초고 (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悠久(유구)한 歷史(역사)와 傳統(전통)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대한민국)은 3·1運動(운동)으로 建立(건립)된 大韓民國臨時政府(대한민국임시정부)의 法統(법통)과 不義(불의)에 抗拒(항거)한 4·19民主理念(민주주의)을 繼承(계승)하고...'

현재 사용되는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은 이러한 문구로 시작된다. 헌법은 한글로 번역한 헌법 내용이 익히 알려져 있긴 하지만 1948년 7월 17일 제정될 때부터 1987년 10월 29일 9차 개정을 거치기까지 줄곧 국한문혼용체로 표시됐다.

지난 2018년 헌법을 한글전용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한글문화연대, 한글학회, 흥사단, 전국교수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비롯한 53개 단체가 모인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운동본부)가 국민 청원을 진행했다.

헌법에서 우리말 논의가 대두된 것은 표현상의 결점 때문이다. 2018년 1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던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국립국어원에 의뢰해 현행 헌법의 문법·표현·표기의 적절성을 검토했는데, 전체 136개 조항 중 111개 조항에서 문법·표현·표기상 오류가 발견됐다.

가령 제72조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라는 조항은 ‘붙일 수 있다’가 아닌 ‘부칠 수 있다’는 표현이 한글맞춤법상 올바르다.

또한 어려운 한자어나 모호한 표현도 문제였다. 예를 들어 헌법 전문에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한자어 ‘각인’은 ‘개인’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의미가 불분명한 표현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68조 1항은 '대통령의 임기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70일 내지 40일 전’은 ‘70일부터 40일 전 사이’로 바꿔야 의미가 분명해진다.

또한 제5조 2항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라는 조항처럼 문장 어순이나 수식이 부자연스럽고 과도한 피동 표현을 쓴 경우도 발견됐다.

헌법 조문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운동본부는 2018년 3월 일반 성인 467명과 중학생 426명 등 총 893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현행 헌법 문장을 그대로 두는 게 좋을지, 바꾸는 것이 좋을지를 묻는 물음에 응답자의 84.4%가 ‘바꾸는 게 좋겠다’고 답했다.

'바꾸는 게 좋겠다'고 답한 이유로는 ‘알기 쉬워 누구나 헌법을 지키기 좋다’가 56.8%로 가장 많았다. 이어 ‘법적으로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가 19.4%, ‘우리말다워 국민 언어생활의 본보기가 된다’가 13.8%로 나타났다.

2018년 개헌 때 한글 전용 논의
권력구조 변경 논란으로 무산

이처럼 정치권과 한글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해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18년 3월 22일 청와대는 현행 헌법에 한자로 나와 있는 표현을 가급적 한글로 바꾼 대통령 개헌안을 공개했다.

당시 개헌안에는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으로 바꾸는 등 한글 전용화가 포함됐다. 또 ’證據湮滅(증거인멸)의 염려‘는 '증거를 없앨 염려'로, '助力(조력)'을 '도움'으로 바꾸는 등 어려운 한자어를 가능하면 우리말로 풀어서 적었다. '영전'(榮典), '의사자'(義死者) 등 난해하거나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부 한자어는 한자를 괄호 안에 함께 표기했다.

일본식 문체도 바꾸는 작업이 진행됐다. '의하여'를 '따라'로, '에 있어서'를 '에서'로 하거나 습관적으로 쓰이는 '인하여'를 최대한 배제하였다. 또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와 같은 명사형 문체 대신 '국민 전체에게 봉사하며'와 같은 동사형 문체로 바꿨다.

하지만 헌법의 한글화는 개헌 이슈를 놓고 다투는 정치권의 갈등으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시 대통령 개정안에는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바꾸는 권력구조 논란 등이 극한 대립에 부딪쳤다.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반대해 국회 본회의에 불참하면서 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된 것이다.

헌재 합헌 판결 받은 국어기본법
개헌 문턱 넘지 못하면 '반쪽짜리'

헌법재판소 전경.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헌법재판소 전경.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당시 청와대는 개헌 취지 중 하나로 국가기관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국어기본법 제14조 등을 앞세웠다. 청와대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으로 거의 모든 법령이 한글화됐는데 대한민국 가치와 질서를 상징하는 헌법은 여전히 한자로 표기되고 일본식 문장이 많이 쓰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문서에 한글을 쓰는 국어기본법 14조는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확인한 사안이다. 2016년 11월 2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공공기관들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춰 한글로 작성하도록 한 국어기본법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한글전용의 국어정책에 반대하고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단체인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를 비롯한 332명의 청구인들은 해당 국어기본법 조항이 일종의 공문서에 해당하는 초·중·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서에서 한자교육을 배제하고 있다며 위헌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공문서의 한글전용을 규정한 해당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현재 한글전용이 보편화되어 있어 대부분의 문서와 책, 언론기사 등이 한글 위주로 작성되어 있고, 한자는 한글만으로 뜻의 구별이 안 되거나 생소한 단어의 경우 그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부기하는 정도로만 표기되고 있다”며 “한자어는 굳이 한자로 쓰지 않더라도 앞뒤 문맥으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특정 낱말이 한자로 어떻게 표기되는지를 아는 것이 어휘능력이나 독해력, 사고력 향상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당시 소송은 교과서를 포함해 공문서에 한글을 전용하는 것은 합법이라고 해도 헌법을 포함한 법령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마땅하냐는 것이었다. 

법제처에 따르면 법령 또한 공문서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한글만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헌법은 국어기본법보다 상위법이어서 국한문을 혼용해서 표기했다고 해서 국어기본법으로 수정할 수 없다. 더욱이 개헌 절차가 뒤따른다는 한계가 명확하다. 국어기본법이 규제법이 아니라 일종의 가이드 지침을 내리는 성격의 법규여서 애초부터 다른 법에 대한 구속력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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