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량감경', '지려천박'...국민 눈 높이 맞춰 난해한 형법 벽 허물어야

2018년 1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한글문화연대를 비롯한 한글 단체,  시민단체,  학부모단체  등 41개 단체가 모여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2018년 1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한글문화연대를 비롯한 한글 단체, 시민단체, 학부모단체 등 41개 단체가 모여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주간한국 장서윤 기자] “피고인에게 위 법률조항의 형을 작량 감경한다.”

최근 진행된 한 형사 재판 판결문의 일부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작량 감경’(酌量減輕)이란 ‘법률적으로는 특별한 사유가 없더라도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원이 그 형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단어다.

이 단어는 지난 2015년 법무부가 어려운 한문 표현을 국민이 쉽게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바꾸겠다며 예시로 든 사례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법조계에서는 민법·형법·형사소송법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하고 법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본법을 한글로 정비하는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판결문과 기사 등에서는 여전히 한 번에 뜻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한자어가 남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법무부는 어려운 법조문을 한글로 바꾸는 ‘기본법 알기 쉽게 새로 쓰기’를 진행 중이다.

로스쿨 변호사 시험 때 불편 호소

2년 전부터 참고용 한글 법전 제공

2015년부터 법무부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의 일본식 표현 잔재를 한글화하고, 어려운 한문 표현 등을 국민이 쉽게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시 법무부 장관 자문기구인 형사법개정 특별분과위원회는 법제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어학자 등 전문가가 참여하는 가운데 형법 개정안 마련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형사법개정 특별분과위원회는 형법 관련 실무가, 학자 등 총 23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형법은 1953년 제정 당시, ‘생(生)하였거나’, ‘작량 감경’, ‘모해(謀害)할 목적’과 같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여 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현행 형법과 형사소송법(1954년)은 제정된 지 60년이 넘었는데 제정 당시 어려운 한자어, 일본식 표현,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형벌에 관한 기본법인 형법을 한글화하면 법률가의 관점이 아닌, 법률 수요자인 국민의 눈높이에서 범죄와 형벌에 관한 형법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국민들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느끼는 두터운 법전의 벽을 이제는 허물어뜨릴 때가 됐다. 이는 법질서 확립과 준법문화 확산의 계기에도 도움이 된다.

더구나 최근에는 로스쿨생들도 법전의 한자어를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전에는 시험장에서 응시자에게 배포한 참고용 법전은 관보에 공고된 법령 원문이 수록됐다. 원문에는 헌법, 민법, 형법 등 15개 법령에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어 일부 수험생들이 불편을 호소했다. 이에 법무부는 2021년 제10회 변호사시험부터 국한문이 혼용된 법령문을 한글로 변환해 제공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려천박’(知慮淺薄)은 ‘사리분별력 부족’으로, ‘작량 감경’은 ‘정상참작 감경’으로 바꾸는 등 형법·형사소송법에 쓰인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식 표현을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개정해왔다. 

지난 2020년 개정된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우리말로 바뀐 사례의 경우 ‘농아자(聾啞者), 농자(聾者) 또는 아자(啞者)’를 ‘듣거나 말하는 데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 듣거나 말하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제(除)한다’는 ‘뺀다’로 변경했다.

일본식 표현인 ‘생(生)하였거나’는 ‘생겼거나’로, ‘형무소’(刑務所)는 ‘교정시설’로, ‘사체’(死體)는 ‘시체’로, ‘수진’(受診)은 ‘진료’로, ‘직근(直近) 상급법원’은 ‘바로 위 상급법원’ 등으로 바꿨다.

어려운 한자어 표현인 ‘정상의 주의를 태안함으로 인하여’는 ‘정상적으로 기울여야 할 주의를 게을리 하여’로. ‘개전(改悛)의 정상(情狀)이 현저(顯著)한 때’는 ‘뉘우치는 정상이 뚜렷할 때’로, ‘국토(國土)를 참절(僭竊)하거나’는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 권력을 배제하거나’로, ‘직무를 행함에 당(當)하여 지득(知得)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전’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소제기 전에’로 바꿨다.

국문법상 어색한 표현도 변경했다. ‘형을 받어’는 ‘형을 선고받아’로, ‘받음이 없이’는 ‘받지 않고’로, ‘제방을 결궤(決潰)하거나’는 ‘둑을 무너뜨리거나’로, ‘누구임을 물음에 대하여’는 ‘누구냐고 묻자’로 바꿨다.

기본법 한글화 작업, 법제처 주도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 추진

법제처는 민법, 상법, 형법 등 국민의 일상생활과 가장 가까운 기본법을 한글화하고,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문장구조를 알기 쉽게 쓰는 사업을 법무부와 협업해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2006년부터 어려운 한자어, 일본식 표현 등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복잡하고 긴 법령문을 이해하기 쉽고 올바르게 개선하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에 그동안 64개 형법 조문, 38개 형사소송법 조문을 한글로 쉽고 명확하게 개정했고,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기본법 조문들의 정비안도 마련 중이다.

이와 관련, 이완규 법제처장은 “법제처는 법령이 만들어지는 단계부터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문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리 검토해 차단하는 한편, 모호한 수식 관계로 의미가 불명확한 문장, 지나치게 길거나 복잡한 문장 등을 적극적으로 정비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법령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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