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안전문' 변경했지만 여전히 혼용…한글문화연대, '우리말 기사' 용어 60개 선정

[주간한국 박철응 기자] '심정지, 골든타임을 잡아라. 식의약 바로 알기 자동심장충격기 사용방법'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1년에 낸 안내 자료의 제목인데, 자동심장충격기가 자동제세동기나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와 동일한 용어임을 별도로 밝혔다. 안전과 직결되는 용어인데도 우리말과 한자어, 영어 표현이 제각각 쓰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한글문화연대의 개선 요청으로 고양시 강매역의 'K&R' 표기가 '환승정차구역'으로 변경됐다. (사진=한글문화연대)
한글문화연대의 개선 요청으로 고양시 강매역의 'K&R' 표기가 '환승정차구역'으로 변경됐다. (사진=한글문화연대)

 

한자어와 외국어는 공공의 영역뿐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넓고 깊게 파고 들어와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른바 '훈민정음 게임'은 외국어나 외래어를 쓰면 벌칙을 받는 방식인데, 대체로 게임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벌칙 대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몇 해 전 한 언론사 기자가 한글날을 앞두고 이 게임을 하루 일과에 적용해봤더니 스무 차례나 걸렸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 중에는 "멘탈 나갈 것 같아요"도 있었다. 

역 부근 K&R?...'환승정차'로 개선
쉬운 우리말로 기사 쓰기 활동도

일부 역 근처 도로 바닥에는 'K&R'이란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사람을 태우거나 내려주는 'Kiss & Ride'의 약어인데, 그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글문화연대는 2021년 2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배웅정차장', '환승정차구역' 등 우리말로 고치는 것을 감독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한국철도공사와 국가철도공단이 강릉역, 둔내역, 만종역, 일광역, 원주역 등 18곳의 역에 있는 K&R 표기를 우리말인 '환승정차'로 개선했다. 

한 때는 국가가 한글을 강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가수들은 방송 출연을 위해 팀의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샌드페블즈는 '모래와 자갈', 어니언스는 '양파들', 휘버스는 '열기들',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개명하는 식이었다. 항공대를 다녔던 배철수씨가 만든 그룹 이름도 당초 런웨이였는데 '활주로'로 바꿨다.

그런 엄혹한 정치적 상황이 한글 쓰기를 억압의 한 갈래로 인식하게 되고, 민주화 이후에는 외국어의 남용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무엇보다 언론에서부터 과도한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지난 6월부터 어려운 외국어 대신 알기 쉬운 우리말로 기사를 쓰도록 장려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에 앞서 507명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으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60%를 넘는 용어 74개를 추렸다. 이를 다시 국어 전문가와 언론단체, 기자들의 자문을 거쳐 개선 가능성이 높은 60개를 최종 선정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중앙 정부 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은 공문서에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국어기본법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법적 강제가 없으면서도 대중적 언어 문화의 주역인 기자들이 '쉬운 우리말 쓰기'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동안 많이 쓰였던 도어스테핑은 '출근길 문답' 혹은 '약식문답'으로 다듬었다. 신종 사기나 범죄 수단으로 자주 거론되는 용어들도 대거 포함됐다. 보이스피싱은 '전화금융사기' 혹은 '전화사기', 피싱은 '전자금융사기', '금융사기', '사기'로, 메신저 피싱은 '대화방 금융사기'로 바꿔 제시됐다. 

또 스미싱은 '문자결제사기' 혹은 '문자사기', 몸캠 피싱은 '불법촬영협박', '몸촬영협박', '신체불법촬영협박'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의미가 보다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외국어가 많이 쓰이는 대표적 분야인 경제 용어를 한글로 많이 다듬었다. 디폴트는 '채무불이행', '지급불능(선언)'으로, 기준금리 결정과 관련된 빅스텝, 자이언트스텝, 베이비스텝은 각각 '대폭조정', '광폭조정', '소폭조정'으로 바꿔 쓰자고 했다.

기업들의 실적 발표 시즌이면 넘쳐나는 표현인 어닝쇼크와 어닝서프라이즈는 각각 '실적충격', '실적급등'이나 '깜짝실적'으로 제시됐다. 또 블록딜은 '시간외대량매매', 모라토리엄은 '지급유예'로, 퍼펙트스톰은 '초대형경제위기'로 쓸 수 있다. 

스쿨존이나 가드레일, 펜스, 스크린도어처럼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들도 '어린이보호구역', '보호난간', '울타리', '안전문'으로 쉽게 바꿔 쓰면 된다.

서울시는 이미 2013년에 지하철 승강장 안내방송을 기존의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닫힙니다)’에서 ‘안전문이 열립니다(닫힙니다)’로 변경하기로 방침을 정한 바 있다. 안내문구도 ‘스크린도어 수동개폐 안내문’에서 ‘안전문 비상시 이용 안내문’으로 용어를 변경했다. 대학생 한글사랑 동아리인 '우리말 가꿈이'의 제안을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크린도어라는 용어가 언론 보도와 일상에서 많이 쓰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지속적인 홍보와 환기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알 수 없는 국제조직 영문 약어 다수
WTO를 '무역기구'로?...80% 수용 

한글문화연대는 교통 분야에서는 포트홀(도로파임, 노면홈), 로드킬(동물찻길사고, 찻길동물사고, 동물교통사고), 블랙아이스(도로살얼음) 등을 개선 대상으로 포함했다. 

최근 들어 많이 쓰이는 용어들도 쉬운 한글로 옮길 수 있다. 가스라이팅은 '심리지배'로 스마트워크는 '원격근무'로, 라이브커머스는 '실시간방송판매'로, 키오스크는 '무인단말기' 등으로 쓰면 된다. 헤이트스피치 같은 난해한 용어도 '혐오표현'이나 '혐오발언'으로 제시됐다. 

영어 약어들도 한글로 표현하면 보다 직관적인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MOU는 '업무협약', ESG는 '환경·사회·투명경영, 사회가치경영', ICT는 '정보통신기술'이 되겠다. 

지난 3월에는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함께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을 꾸렸다. 국립국어원도 협의에 참여한다.

이 모임은 지난달 온라인에서 성인 1047명을 대상으로 국제조직(기구)의 인지도를 조사했는데, WHO(세계보건기구)의 인지도가 71.5%로 가장 높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69.0%, WTO(세계무역기구) 57.7%, IAEA(국제원자력기구) 43.7% 순이었다. 

하지만 ISO(국제표준화기구) 26.7%, ILO(국제노동기구) 21.9%, IEA(국제에너지기구) 20.5%,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19.1%로 낮게 나타났다. BIE(국제박람회기구)와 WIPO(세계지적재산권기구)의 인지도는 각각 3.5%, 4.4%에 그쳤다. 

이 모임은 우리말 약칭을 제안했다. 실제로 WHO 대신 '보건기구'로 바꾸는 것이 적절한 지 물은 결과, 응답자의 77.6%가 '매우 적절하다' 또는 '적절하다'고 답했다. OECD는 '경협기구', WTO는 '무역기구'로 바꾸는 데에는 각각 62.2%, 79.9%가 수용 의사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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