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울, 대구 등의 순으로 남용 비중 높아...습관적 '관례'에 갇힌 공무원들

지난달 20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제12회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 특강.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지난달 20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제12회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 특강.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주간한국 장서윤 기자] ‘Beer & Non-Alcohol Beer sharing, 정원테라피 등의 활동을 한다.’, ’Tea Party, 드로잉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전남 순천시가 배포한 ‘개방정원과 연계한 열린정원 여행 프로그램 운영’이라는 보도자료의 일부 내용이다. 해당 자료를 살펴보면 ‘정원 테라피’나 ‘드로잉 체험’같은 외래어와 한국어를 접목시켜 표기한 부분은 오히려 나은 편이다. 아예 한글 표기 없이 영문만 버젓이 실려 있는 대목도 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이들은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맥주·무알콜 맥주 나눔’, ‘차 모임’ 등의 한글 단어로 표기하면 바로 알기 쉬운 데다 알파벳에 비해 글자 수도 줄어 훨씬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영어로 표기했을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대목이다. 언론에서 이를 지적하는 보도가 이어지자 순천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며 “앞으로는 쉬운 표현으로 작성하겠다”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일부 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각 지자체마다 공식 표기나 홍보물 등을 알기 쉬운 한글로 바꾸려는 노력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지자체가 습관적으로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 사용을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말 해침꾼 1위로 부산시 선정

외국어 남용 보도자료 비율 70%대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는 지난해 8월 지방선거 이후 새 지자체장 취임을 전후한 2개월간 광역자치단체의 보도자료에서 외국어 용어와 외국 글자 표기가 얼마나 사용됐는지 분석했다.

전체 17개 광역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22년 6월 보도자료 발행 건수는 2108건이었다. 이중 불필요한 외국어 용어와 외국 글자 표기가 담긴 보도자료는 53.7%에 달했다.

그런데 새 단체장이 취임 이후인 7월 한 달 동안 발행된 전체 보도자료 2191건 가운데 불필요한 외국어 용어와 외국 글자 표기가 담긴 보도자료는 54.4%로 집계됐다. 새 단체장 취임 뒤 외국어 남용이 0.7%포인트나 늘어난 것이다.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 보도자료 비율이 가장 높은 광역자치단체는 부산이었고, 서울과 대구가 그 뒤를 이었다. 부산의 외국어 남용 보도자료 비율은 75%(6월), 74.7%(7월)에 달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에는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 등을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보도자료와 같은 공문서는 불필요하게 외국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로마자 알파벳이나 한자로 적어서도 안 된다. 한자나 외국 글자를 사용하려면 먼저 한글로 적고 그 뒤에 괄호를 쳐서 병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나 신조어 및 전문어일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이에 현재 지자체들이 각종 공문서에 남용하고 있는 외국어 등은 국어기본법에도 명백히 위배되는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례상’이라는 이유로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공문서에 외국어나 한자어 남용은 여전히 그 비율이 높다.

우리말 사랑꾼은 울산시·세종시

첨단 용어 순화한 중기부도 포함

이런 상황에도 꾸준히 우리말 순화에 앞장서 온 지자체와 정부 부처도 있다. 울산광역시와 중소벤처기업부 등 두 기관은 지난해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우리말 사랑꾼’으로 뽑혔다.

울산광역시는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보도자료에서 외국어 용어 대신 우리말을, 외국 글자 대신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과 또한 유지해 왔다.

앞서 언급한 외국어 사용 보도자료 순위에서 울산은 18.8%(지난해 6월 기준)로 17개 지자체 중 외국어 사용 최저 수준을 보였다. 이는 1위인 부산의 약 4분의 1에 불과한 외국어 사용 빈도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외국어로 표현되는 다양한 첨단산업 용어 때문에 보도자료 등 공문서에 외국어 용어와 외국 글자 사용이 잦았으나 지난해 이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글문화연대는 “공공언어 사용에서 외국어 남용을 어쩔 수 없는 문화로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에 따라 문화가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해준 사례”라고 전했다.

반면, 우리말 해침꾼으로는 영어상용도시 추진으로 물의를 빚었던 박형준 부산광역시장과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이 선정됐다.

‘한글 문화수도 실현’을 핵심 발전 전략으로 삼은 세종특별자치시도 우수 사례로 꼽힌다. 세종시는 지난달 2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22년도 국어책임관 업무 실적 우수 기관’으로 뽑혔다. 국어책임관제도는 ‘국어기본법’에 의거해 지자체장이 국어 발전·보전 업무를 총괄하는 소속 공무원을 국어책임관으로 지정하게 돼 있다.

세종시는 지난해 신설한 미래전략본부 내 전략기획과장을 국어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국어책임관으로 지정했다. 또한 문화수도담당팀을 신설해 한글문화수도 조성 등 한글·국어 진흥을 위한 각종 정책을 추진해왔다.

특히 한글과 국어 관련 전문가·일반시민 등으로 구성된 한글사랑위원회를 통해 행정용어 56건을 발굴하고 순화어 사용을 전국 시·군·구에 권고했다. 또 찾아가는 국어문화학교를 운영해 소속 공무원을 교육하고 시민이 알기 쉬운 용어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공모를 통해 한글특화거리 조성 대상지로 선정한 한글사랑거리 내 간판 20개를 아름다운 한글로 개선했다. 이에 앞서 2011년부터는 도로와 아파트 명칭을 한글로 표기하는 사업을 전개한 바 있다.

세종시의 한 관계자는 “이전에 해왔던 ‘관행’이라는 틀을 깨고 시민들이 알기 쉽고, 한글 발전에도 일조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지자체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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