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 모습. 미국 하원은 지난 12일(현지시간) 기후변화 대응, 의료보장 확충, 대기업 증세를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미국 의회 모습. 미국 하원은 지난 12일(현지시간) 기후변화 대응, 의료보장 확충, 대기업 증세를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희망을 안겼지만 한국 자동차 업계에는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한국 자동차 회사와 배터리 기업들은 줄줄이 대규모 대미 투자에 나서며 미 정부와 의회의 찬사를 받았고 시장 선점에도 성공하고 있지만 규제에 막혀 사업 확대가 어려워진 탓이다.

인플레 감축법은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제시했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법안의 연장선이다. 경쟁국, 특히 중국에 비해 뒤처진 미국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재건하겠다는 이 법안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오며 좌초됐다.

집권 2년차를 맞아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BBB법안 중 기후변화와 의료 분야 등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새 법에는 서민들의 불만이 많은 약가 인하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투자 확대, 전기차 보조금 지급 등이 포함됐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전기차 분야다. 자동차 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파급효과가 큰 탓이다. 

미국은 전기차 구입시 정부가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연말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세액 공제를 받으려면 그 이상의 세금을 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번 법은 신차 구입시 최대 7500달러, 중고 전기차를 구매해도 최대 4500달러의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는 신차를 구입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전기차를 구입하려고 해도 상당한 대기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해 즉시 구입이 가능한 중고차로 대상을 확대한 것이다.

기본적인 법의 취지라면 K배터리를 앞세워 전기차 분야에서 약진중인 우리 기업들이 웃어야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미국산 자동차라는 규정과 중국산 배터리나 배터리 원료 광물을 포함한 차량에 대한 제한이 신설된 탓이다. 

미국이 전기차 보조금에 제한 규정을 둔 것은 자국 산업 보호와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의 급부상을 차단하고 견제하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애초부터 노조를 적극 지지하는 바이든 정부가 해외 생산 차량에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중국은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급선회하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돼왔다. BYD, 니로 등 중국 전기차들과 배터리 업체 CATL은 무섭게 질주해왔다.

이 대목에서 테슬라를 필두로 전기차 시장을 선도한 미국으로서는 딜레마와 직면한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전기차 보급 확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다가는 중국의 물량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한 듯 감축법은 즉시 시행 대상을 미국 내 생산차량으로 한정했다.

불똥은 우리에게 튀었다. K배터리를 앞세워 향후 전기차 분야를 주도하려던 우리 자동차 업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판매가 급격히 증가한 현대차·기아는 즉각 영향권이다. 미국 에너지부가 공개한 인플레 감축법 수혜 자동차 명단에는 현대차·기아의 차량이 없다. 

미국에 판매중인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차 EV6는 한국산이다. 현대차·기아는 내년에는 아이오닉6와 EV9을 앞세워 미국 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었다. 이들 차량은 국내 생산이 예정됐다.

명단에 포함된 차량들은 대부분 미국기업들의 차량이다. 외산브랜드 차량으로는 BMW, 벤츠, 아우디 등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와 일본 닛산 등이 포함됐다. 

미국 매체 더 버지는 인플레 감축법이 좋아 보이지만 인기가 많은 현대 아이오닉 5나 기아 EV6가 세액 공제 대상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혜택 대상 차량은 셰보레 볼트, 닛산 리프를 제외하면 대부분 프리미엄급 차량이다. 그만큼 평범한 소비자들이 전기차를 구매하기 어려워졌다는 불만이다.

물론 이 법의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보조금 직접 지급이 아닌 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내년부터는 부유층은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외벌이 연소득 보고자는 15만달러, 부부 공동 보고일 경우에는 30만달러가 넘으면 안 된다.

차량 가격도 제한된다. 승용차는 5만 5000달러, 픽업 트럭, SUV 및 밴은 8만달러 이하여야 한다. 만약 추가 선택사양을 추가해 차량 가격이 한도를 넘을 경우 혜택을 볼 수 없다. 전기차 가격은 원료가격 상승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다.

미국 차량도 즉각 혜택을 보기는 어렵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테슬라, 제너럴모터스(GM), 도요타는 이미 올해 20만대 이상씩을 판매했다. 포드 역시 곧 20만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금 혜택은 제조사별로 연간 20만대까지다. 연내 이들 회사의 신차를 구입해도 세금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는 인플레 감축법의 직접적인 영향이 크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럼에도 전기차 세제 혜택 없는 차량의 경우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자동차 업체들이 기존 미국산 구매 법 완화 등 대안을 정부에 요청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정부는 우리 자동차 업체가 차별적 대우를 받지 않도록 지원해 나가겠다고 했지만 이번 법에서 예외 조치를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미국 등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해 전기차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미 LG에너지, SK온 등 배터리 업체들은 물론 현대차·기아는 미국내 투자를 확대하며 생산시설을 설치하거나 확장 중이다. 당분간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산 규제를 넘어서더라도 원재료 확보는 더 큰 과제다. 중국산 배터리 원료를 미국산으로 대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 자동차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