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그야말로 유럽의 위기다. 유럽연합(EU) 출범과 유로화 사용을 계기로 미국에 맞서는 정치 경제 권역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던 유럽이 20여년 만에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인플레이션 급등, 러시아와의 갈등은 유럽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경제는 추락 중인데 치솟는 물가는 버겁다. 미국에 등 떠밀려 금리도 올려야 한다. 

과연 유럽은 재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세계적 위기의 도화선이 될까. 근본적인 해법이 나오지 않는 한 낙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유로화 가치는 현재 유럽의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지난 25일(현지시간) 기준 유로·달러 환율은 0.996이다. 1유로로 1달러도 바꿀 수 없다. 두 통화의 가치가 같아지는 패리티(Parity)가 무너졌다. 무너진 환율은 반등에 실패하고 고착화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통화가치는 국가의 국력, 특히 경제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유로·달러 환율이 미국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6까지 치솟았던 것을 기록하면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극적인 반전이다. 

유로화가 브렉시트 위기가 부상한 2015년 이후 2년간 달러와의 패리티가 위협받기도 했지만, 다시 반등했었던 점과 비교하면 변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유로가 지난해 5월까지만 해도 달러와 비교해 1.2배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변화는 더욱더 극적이다.

유로화, 나아가 유럽의 위기 이유는 복합적이다. 고질적인 정치, 경제적인 병폐가 사라지지 않은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추락한 경제의 회복 속도가 미국에 뒤지고 있는 상황이 근간이다. 물론 결정타는 러시아와의 갈등이다.

영국, 이탈리아 등의 정치 위기가 유럽을 흔들었다면 경제 맹주 독일의 추락은 더욱 뼈아프다. 

독일은 유럽 통합을 계기로 자국 경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는 유로화를 사용하며 큰 수혜를 누렸다. 그리스가 유로화를 사용하며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자화자찬에 빠졌다면 독일은 유로화 도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봤다. 

독일이 마르크화를 사용했다면 독일 자동차 등 주요 수출품 가격이 상승했겠지만, 유로화 도입은 독일에게 축복이 됐다. 독일 차가 미국 등 경쟁국에 비해 낮은 가격에 수출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런 상황을 가장 눈엣가시로 지켜봤던 게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독일의 마이너스 금리를 지속해서 강조하며 미국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와도 앙숙 관계였다. 독일이 주독 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미국에 지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러시아와 노르트 스트림2 송유관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국제사회 여론은 트럼프가 아닌 메르켈의 편이었지만 지금 상황은 트럼프의 입장이 맞았음을 보여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취임 후 핵심 우방인 독일과의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전제주의를 내세워 국제사회에서 약화한 입지 강화에 나섰다. 과거 미국과 러시아는 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구성해 맞섰지만 미국과 유럽연합이 세를 불리면서 균형의 추가 크게 흔들렸다. 헝가리, 폴란드 등 옛 소련 위성 국가들은 유럽연합에 가입해 경제 발전을 가속했다. 

러시아의 불만이 커지는 중에 우크라이나마저 EU 가입을 추진하자 푸틴은 더 인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독일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에 석유를 의지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확산하며 에너지 사용이 늘어남에도 러시아산 석유 사용을 늘리며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6개월이 지났지만, 유럽의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점은 애당초 푸틴이 그린 큰 그림에 유럽이 놀아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서방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는 순항하고 유럽은 난제만 쌓여 있다. 유로화 가치 하락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추락했던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전쟁 이전보다 높아졌다. 러시아가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며 대응에 나선 데다 국제유가 강세는 루블화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럽이 오는 겨울을 무탈하게 넘길 수 있는지 여부다. 기후변화로 에너지 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에어컨 없이도 살던 영국을 강타한 40도에 육박하는 이상 기온은 올 겨울 혹한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상기후와 에너지 위기,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겹치는 복합 위기는 유럽의 겨울을 더욱 암울하게 한다. 이 와중에 푸틴은 연일 가스 공급 중단을 협박하고 있다.

에너지 위기는 유럽의 인플레이션을 치솟게 했다. 유럽은 인플레이션이 치솟아도 경제가 순항 중인 미국과 대비된다. 유럽 경제를 대표하는 독일의 상황이 특히 우려스럽다. 

유로화 사용국인 유로존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0.7%로 예상 이상이었지만 전망은 부정적이다. 특히 유럽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독일의 경제지표가 이상징후를 보인다. 

독일의 2분기 GDP는 0.1% 깜짝 성장했지만, 에너지 위기가 더욱 확산한다면 다시 침체로 돌아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가을 중으로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10%를 넘어서 1951년 이후 70년 만에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만약 러시아가 이번 겨울 독일과 유럽으로 향하는 석유와 가스를 틀어쥔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정치·경제가 안정됐지만 유럽국가에서는 경제에 이어 정치 불안이 확산될 경우 지정학적 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최악의 상황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미 영국,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혼란상이 목격된다. 2010년대 중반 유럽을 뒤흔들었던 재정위기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미국 아메리칸 대학의 나오미 호사인 교수는 “다가오는 올 겨울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면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불안이 심화할 것”이라면서 “내가 정치인이라며 정말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유럽 연합 본부가 자리잡은 브뤼셀에 소재한 경제 분야 싱크탱크 브뤼겔의 시모네 탈리아피에트라 선임연구원은 “누구도 정전을 원하지 않는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지 않도록 모든 옵션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를 해결할 뛰어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것도 유럽의 아킬레스건이다. 과연 유럽은 되살아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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