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런던의 하원의사당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영국 의회 제공)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런던의 하원의사당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영국 의회 제공)

국제 환시장이 지뢰밭이 됐다. 달러를 제외한 모든 통화가 위기다. 우리 원화가치도 연일 약세를 보이며 고민이 크지만 유럽 특히 영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불길이 좀처럼 잡히지 않고 금리 인상이 지속될 경우 또다른 아마겟돈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영국은 국제 통화 시장 혼란을 자극했다. 1992년 전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상황이 최근 재현된 것이다. 신임 영국 총리가 지출 축소 없는 감세 정책을 선언하자 파운드가 달러 대비 사상 최저로 추락했다.

금융 시장은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1992년 9월, 헤지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소로스가 파운드화 폭락을 경고하며 파운드화를 투매한 것이다. 다른 헤지펀드들도 동참했다. 

존 메이저 당시 영국총리는 “파운드화 평가절하는 영국의 장래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맞서며 총력 방어에 나섰다.

결론은 메이저 총리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 영국 재무부의 처절한 패배였다. 영국은 파운드의 가치 하락을 방어하지 못하고 단 하루 만에 유럽환율메커니즘(ERM) 탈퇴를 결정했다. ‘검은 수요일’로 불릴 만큼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현재의 상황도 당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BOE와 영국 재무부는 연이어 시장을 자극하는 행동으로 실망을 샀다. 영국의 국채 매입 프로그램 종료에 대해 BOE와 재무부가 다른 입장을 내놓자 시장의 의심만 커졌다. 

영국은 이미 문제아로 낙인 찍힌 상황이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감세가 필요하지만 공공지출은 줄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가채무가 늘어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 이유다. 이는 파운드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투자자들은 일제히 파운드를 팔아 치웠다. ‘젊은 대처’라는 기대를 받은 트러스 총리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시절 기록된 파운드화 최저 기록을 갈아치우는 오명을 썼다.

파운드만이 아니다. 안전자산으로 평가되는 영국 국채(길트)도 굴욕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영국 대표 경제지인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비트코인보다 길트의 추락이 심각하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지난해 11월 이후 67% 하락했다. 반면 지난해 11월 23일 발행된 영국의 50년물 물가연동국채값은 78.6% 떨어졌다. 거품 논란이 큰 가상화폐보다 영국 국채가 더 하락한 것에 대해 FT는 "우리도 이런 기사를 쓴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까지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의 타계와 파운드, 길트의 추락이 영국의 쇠퇴를 상징한다고 전했을 정도다. 영국 외 다른 유럽 국가들도 안심할 수 없다. 과거 유럽 재정위기의 시발점인 그리스, 극우 총리가 취임한 이탈리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를 공격한 배경은 지금 상황과 맞물린다. 당시 독일 통일과 이로 인한 동독 경제 부흥 정책으로 독일 금리 상승은 ERM 참가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지나친 환율 절하를 막으려면 독일 금리 인상을 따라가야 했다. 

지금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연이은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가 치솟자 유로, 파운드, 엔, 위안, 원 등 주요국 통화들은 연일 약세다. 금리 인상의 근거가 되는 미국 인플레이션 지표가 시장의 예상을 깨고 치솟을 때 마다 달러는 오르고 경쟁 통화들은 썰물처럼 밀려났다.

전 세계 국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미국은 다르다. 기축통화국인 만큼 자국 인플레이션만 잡으면 된다. 달러 강세는 수입물가를 낮춘다. 연준은 과거처럼 신흥국의 긴축발작을 우려해 통화 정책을 운영할 여유도 없다. 8%대까지 치솟은 인플레이션 차단만이 목표다. 

미국 정부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달러 가치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자국발 인플레이션이 금리인상을 불러오고 달러가 아닌 통화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표현한 만큼 국제공조를 구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옐런은 달러의 향방이 서로 다른 정책 기조에 따른 논리적 결과이며 달러 강세는 적절한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옐런의 발언은 달러 가치의 급변을 제한하기 위한 시장개입이나 신흥국의 부담 확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옐런의 발언은 통화가치 하락을 우려해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려는 국가에는 부정적이다. 우리 정부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자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이 유동성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쉽지 않다. 

통화가치를 낮추기 위해 경쟁하던 ‘환율 전쟁’은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각국이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역(逆)환율 전쟁’의 시대다.

연준이 지난달 세 번 연속 자이언트 스텝 금리 인상을 발표하자 다음날 영국, 스위스 등 13개국이 금리를 인상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역환율 전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압박이 중앙은행을 짓누르는 상황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10월 ‘빅 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의 배경으로 급격한 원화가치 하락이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IMF 월드뱅크(WB) 연차총회에서 “각국이 통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시장 개입을 삼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달러 매도를 통해 자국 통화가치 유지를 시도하다가는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중앙은행의 긴축 과정에서 정부가 지출을 늘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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