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영국 하원에서 열린 총리 질의응답(PMQ)에 출석해 발언 중인 리시 수낙 신임 영국 총리. (사진=연합뉴스 제공)
지난 26일 영국 하원에서 열린 총리 질의응답(PMQ)에 출석해 발언 중인 리시 수낙 신임 영국 총리. (사진=연합뉴스 제공)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리시 수낙 신임 영국 총리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런 예다. 

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인도계 정치인이 영국 총리가 될 것으로 상상했을까. 미국의 흑인 대통령 등장만큼 세계를 놀라게 할 뉴스였다. 

그러나 친미 성향, 인도 재벌의 사위, 세금 탈루 논란 등의 이슈가 있었음에도 수낙이 총리를 맡았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 정가에 혼란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부터 시작된 영국 총리들의 수난과 혼란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중책이 백인이 아닌 인도계 총리에게 떨어졌다는 점은 영미 국가 진영의 방향에도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백인이 아닌 영국 총리의 등장은 분명 영국은 물론 국제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흑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 미국 정계와 전 세계에 불러온 변화의 바람을 기억한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수낙의 등장에 가장 민감할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영국은 미국의 핵심 우방이다. '파이브 아이즈'로 불리는 영어권 국가들의 정보 공유 체계에서도 영국은 핵심이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도 있지만 영연방의 종주국인 영국은 미국에게는 최상위 동맹국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선 것도 영국이다. 

시계를 과거로 돌려 걸프전 등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도 영국은 든든한 우군이었다. 수낙은 이런 상황에 의문을 들게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영국 의회는 백인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여성의 의회 진출이 대폭 늘었고 무슬림계 의원도 눈에 띈다. 자신이 게이라고 성정체성을 밝힌 의원들도 있다. 백인 남성 위주 인사들 중심으로 국제 관계를 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연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수낙 총리 취임 직후 첫 전화통화를 하며 영미 관계를 재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수낙과 통화 후 발표한 성명은 미국의 관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바이든은 “세계 안보와 번영에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협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열망을 강조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우크라이나 사태, 중국 견제를 거론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으로 국제 정세가 혼미한 상황에서 영국 총리가 40여일 만에 교체된 것은 미국에게도 적잖은 숙제를 남겼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비록 인도계이긴 하지만 수낙의 총리 취임이 반가울 수도 있다. 

수낙은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지만 정계 입문 전까지 미국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다. 수낙은 2001년부터 3년간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런던 지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이후 2004년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주 소재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스탠퍼드 대학은 실리콘 밸리의 근간이다. 영국 총리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미국 '빅테크'들이 커가는 상황을 지켜봤다는 의미이다.

수낙이 인도 재벌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도 이때다. 수낙은 미국이 준 장학금으로 스탠퍼드대학에서 공부하며 같은 인도계 재벌 아내를 맞이하게 됐다는 점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할 것임을 보여준다. 수낙의 비즈니스 경험도 미국 중심이다. 심지어 수낙은 미국 영주권자였다. 그가 재무장관 취임을 앞두고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도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수낙도 자신의 미국 경험이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백했다. 수낙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의 경험을 중요한 정치 자산으로 거론했다. 

수낙은 “캘리포니아에서 살며 일했던 것이 내가 이 직업(정치)을 잘할 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재무부 장관시절에는 미국 스타트업 기업의 경영방식을 정부 운영에 도입하려 했다. 

그는 심지어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한 영국의 ‘브렉시트’를 지지하게 된 이유로 지목했다.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영국이 독자적인 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수낙이 역대 어느 영국 총리보다 친 미국적인 시각을 가졌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수낙이 미국 정계에 친숙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워싱턴DC 인사들에게 수낙은 여전히 낯선 인사다. 특히 수낙이 캘리포니아주에서만 활동했었다는 점은 워싱턴 정가와의 인맥이 거의 없음을 시사한다. 그나마 수낙과 접점을 가졌던 미국 정부 인사는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 정도다. 

두 사람이 바이든 정부가 적극 추진한 글로벌 최저 법인세 도입에 적극 협력했다는 점은 향후 영미 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수낙은 보수진영이지만 바이든은 중도 진보파다. 그럼에도 미국은 수낙의 협조가 필요하다.

수낙의 등장은 인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의 협조가 필요하다. 

인도는 미국의 러시아 견제에도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는 독자 노선을 걸어 미국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런 인도를 움직이기 위해 인도계 영국 총리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인도 최대 명절인 디왈리 축하 성명을 발표하면서 수낙이 영국 총리가 됐음을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바이든은 수낙의 총리 취임이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바이든이 이 행사에서 수낙의 이름을 잘못 부른 것은 옥의 티였지만 수낙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며 인도를 끌어안으려 하는 의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수낙에게 취임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크렘린궁 측은 영국이 비우호 국가이기 때문에 총리 취임을 축하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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