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지난 26일 인도네시아 북수마트라주의 델리 세르당에서 새로 수확한 팜 열매를 오토바이로 나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노동자들이 지난 26일 인도네시아 북수마트라주의 델리 세르당에서 새로 수확한 팜 열매를 오토바이로 나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 세계적인 식량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치솟는 식량 가격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각국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상을 불러와 경기 침체를 앞당길 수 있다는 우려에 더해 식량 이기주의에 기반한 국가간의 또 다른 갈등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전 세계 각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식량 수출 제한은 멈추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의 팜유 수출 중단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식용유 대란을 불러온 데 이어 이번에는 말레이시아가 닭고기 수출 중단을 선언했다. 인도는 밀에 이어 설탕도 수출 제한 대상에 올렸다.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을 재개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이후 공산품 위주로 타격을 받았던 공급망 문제가 이제는 식품 분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또 다른 어떤 품목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식량 문제는 이제 경제적 차원을 떠나 국가간 갈등으로 변질되는 조짐이 포착된다. 영국 BBC 방송도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식량 민족주의(food nationalism)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말레이시아 총리가 설명한 닭고기 수출 중단 배경은 식량 민족주의 급부상을 보여주는 예다. 그는 “우리 정부의 우선순위는 우리 국민이다”라고 선언했다. 다른 국가의 사정을 살펴볼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전체 닭고기 소비량의 3분의 1을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하는 인접국가 싱가포르의 사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인 셈이다.

말레이시아의 닭고기 수출 금지 조치는 세계 식량 위기 상황이 악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세계은행(WB)은 기록적인 식량 가격 상승으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빈곤과 영양 부족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도 긴급한 국제적 조치가 없다면 앞으로 가장 빈곤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각국의 대책을 요구했다.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식량 위기가 중요하게 논의됐다.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 세계식량계획 사무총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차단을 세계 식량 안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는 이미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식량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던 식량, 비료가 차단되고 여기에 가뭄과 식량 인플레가 더해지면서 '지옥문'이 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전 세계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의 식량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도 식량 공급망을 위협 중이다. 우크라이나 밀의 공백을 메울 것으로 기대됐던 인도에서는 50도에 가까운 때아닌 폭염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인도는 세계 2위 밀 생산국가다. 인도의 밀 수출 중단은 전 세계보다는 인근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인도 밀 수출량의 절반가량이 인접국인 방글라데시로 향해왔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갈등 요인인 닭과 비슷한 예다.

소니아 악터 싱가포르 리콴유 공공대학 교수는 “각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에 치중하다 보니 식량 민족주의를 앞세우고 있다”고 우려했다. 악터 교수는 “점점 더 많은 국가가 식량 이기주의를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식품 가격 상승과 식량 위기도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반론도 있다. 윌리엄 첸 난양 공과대학 교수는 수출 제한이 식량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 제한을 해제한 것을 상기하면서 “이는 식량 가치 사슬의 상호 연결성을 잘 반영한 것이다. 어떤 국가도 자국민에게 필요한 모든 식량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식량 자급이 어려운 만큼 충격요법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식량 위기는 러시아가 노리는 서방측의 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와의 통화에서 서방 측이 세계 식량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러시아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서방의 제재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항 봉쇄를 맞바꾸자는 의도가 읽힌다.

식량 위기는 또 다른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에서 식량위기가 발생할 경우 대규모 난민이 발생해 유럽으로 향하는 경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을 옥죈 결과로 시리아 내전과 극단주의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의 등장으로 불거졌던 대규모 중동 난민 유입 사태가 되살아날 경우 유럽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푸틴이 당장 우크라이나 점령에 실패했지만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 서방측이 불리해 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일간 가디언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큰 피해를 봤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카드를 쥐고 있다고 평했다.

밀 부족 상황이 지속되면 쌀 시장도 흔들릴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최근까지도 풍작이어서 생산량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밀 부족 현상으로 쌀 소비가 늘어나면 쌀값도 오늘 가능성이 크다. 쌀값의 10% 이상 급등도 가능하다는 예상도 나온다.

안심할 수 없다. 기상 악화와 비료 부족 상황은 언제든 쌀 역시 위기 상황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위기가 발생하면 대표적 쌀 수출 국가인 태국, 베트남, 인도가 쌀 수출에 규제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이 불가피하다. 식량위기의 ‘연쇄반응’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식량 안보 전문가인 피터 티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각국이 패닉에 빠지지 않고 식량 비축을 하지 않는다면 2008년 쌀 가격 급등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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