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목적에 인본주의와 인권 담겨...대통령 등 정부 고위층 외국어 남발 사례 심각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한글을 대중화시킨 대표적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남긴 말이다. 2023년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온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가장 큰 목적은 소통이며, 인본주의와 인권의 개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공공 언어에 외래어와 외국어가 남용되고, 그만큼 국민 알권리가 침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글은 한국인의 자랑이자 권리다. <주간한국>은 공공 영역에서 한글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과 논란, 개선 과제를 20회에 걸친 장기 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1942년 말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당시 함흥지방재판소의 결정문 중 일부다.

이에 따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됐다. '고유 언어' 즉 한글을 지키는데 헌신한 이들 33명이 무더기로 수감됐고, 조선어사전 편찬이 일제 통치에 반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2명은 고통 속에서 옥사했다. 

2019년 573돌 한글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기념 행사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2019년 573돌 한글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기념 행사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80년이 흘러 지난해 한글날 경축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한글은 우리 겨레 최고의 문화유산일뿐 아니라 인류의 경이로운 성취"라고 평가했다. '말씨는 겨레의 표현이요, 그 생명이요, 힘이다'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공공기관, 언론과 함께, 공공언어에서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총리 "메인테인할 수가 없다"
尹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하지만 한 총리는 불과 한달여 후에 이와 전혀 상반되는 언어 습관을 보여줬다. "국민들이 익스펙테이션(expectation)을 가지는 것, 플레이어(player)들이", "성장을 메인테인(maintain)할 수가 없다는", "리얼 레이트 인터레스트(real rate interest)나 내추럴(natural) 레이트 인터레스트가 거론될 이유가 없지만", "이건 조금 아웃 오브 데이트(out of date)하다" 등의 외국어가 난무했다. 

지난해 11월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쏟아낸 표현들이다. 공식석상과 달리 비교적 가볍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총리의 평소 언어 습관이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영어를 즐겨 섞어 사용하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21일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국민경제자문회의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Government Engagement)가 바로 레귤레이션입니다. 그러면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aggressive)하게 뛰어봅시다" 등이 대통령실이 공개한 발언 전문에 담긴 표현들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여당 지도부와의 오찬 회동에서 용산 공원과 관련해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 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글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국가 지도자는 그 직함에 걸맞게 국어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 상식일뿐 아니라, 과도한 영어 혼용 등은 법적으로도 어긋난다. 바로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국가와 국민은 국어가 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임을 깊이 인식하여 국어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씀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계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기본 이념을 담고 있다.

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게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 능력 향상과 지역어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책무를 부여하고 있다. 

해방 후 정한 한글전용법 유명무실
참여정부, 2005년 국어기본법 제정

그럼에도 윤 대통령과 한 총리의 사례에서 보듯 국어기본법에 역행하는 '한글의 수난'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은 "우리 말을 써야 한다는 의식이 많이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영어를 쓰며 우쭐대던 예전 사고방식이 여전한 것 같기도 하다"면서 "지도자들은 국어기본법의 취지대로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목숨을 걸어가면서 한글을 지키려 했던 과거, 정부와 국민들 간 원활한 소통과 알 권리가 침해되는 현재,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곱씹어봐야 할 때다.

1894년 11월, 한글은 비로소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고종이 칙령(임금이 내린 명령)을 통해 법률과 칙령의 기본을 모두 국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섞어서 쓸 것을 규정한 것이다. 한글이 창제된 지 약 450년만이었고, 언문으로 천시받아온 세월을 넘어 제자리를 잡아간 셈이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거친 이후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대한민국의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한글전용법이 마련됐다. 그러나 내용은 두 문장이 전부였고 공직 사회에서 그 효력이 크지 않았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2004년 참여정부가 국어기본법을 정부 입법안으로 발의해 국회에서 통과됐다. 당시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은 제안 설명을 하면서 "국어 정책의 수립과 시행,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 국어의 국외 보급 및 국어정보화 등을 통한 국어의 보전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국민의 창조적인 사고력을 증진하고 민족문화의 창달에 기여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한글전용법을 대체하고 정부의 의지를 담아 국어 정책의 기본 체계를 마련한 것이다. 이 법안은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 등을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명시됐다. 또한 5년마다 국어 발전계획 수립 시행, 국어 문화 확산 홍보와 교육, 전문용어의 표준화, 교과용 도서의 어문규범 준수, 국어능력 검정, 국어문화원 지정 등이 포함됐다. 

2012년 한자 애용론자들 헌법소원 청구

헌재 "한자 쓰지 않아도 이해 가능" 기각 

위기도 있었다. 2012년 일부 학부모와 대학교수, 한자·한문 강사 등 300여명이 "한자어가 한국어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말의 정확한 이해와 사용을 위해서는 한자 사용이 필수적"이라며 국어기본법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16년 11월에 이를 기각해 국어기본법에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민들은 공문서를 통하여 공적 생활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의 권리 의무와 관련된 사항을 알게 되므로 우리 국민 대부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면서 "한자어를 굳이 한자로 쓰지 않더라도 앞뒤 문맥으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쉬운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국민 알 권리와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짚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한자나 영어 등을 남용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한글문화연대가 2019년에 중앙정부 보도자료 6798건을 조사한 결과, '스마트'나 '인프라'처럼 외국어를 남용한 사례가 자료 하나마다 평균 6회에 이르렀다. 

국어기본법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는 지난해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회보를 통해 "요즘 공공기관이 이 법(국어기본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영어를 마구 섞어 써서 우리 말글살이가 몹시 어지럽게 되었고 이 법이 있으나 마나한 법이 될 판"이라며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책임자를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는다는 처벌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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