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수단으로 잇달아 추진...시민단체들 "한글과 고유문화 정체성 훼손" 지적

지난해 8월 29일 박형준 부산시장과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의 선거 공약인 ‘부산 영어상용도시’ 정책 추진에 반대하는 34개 부산 시민사회단체들과 76개 국어단체들이 부산시청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지난해 8월 29일 박형준 부산시장과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의 선거 공약인 ‘부산 영어상용도시’ 정책 추진에 반대하는 34개 부산 시민사회단체들과 76개 국어단체들이 부산시청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글문화연대 제공)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육회가 ‘six times', 곰탕이 'bear stew'? 과거 국내 한식당에서 메뉴판에 이 같은 엉터리 영어 번역문을 병기하는 해프닝이 언론 보도를 통해 크게 알려진 적이 있었다.

식당 주인은 그야말로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웃고 넘어갔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말의 영어 번역문이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불친절한 영어 표기로 불편을 느낄 수 있어서다.

최근 이 같은 언어장벽을 깨기 위해 부산광역시과 인천광역시 등 지자체들이 경제자유구역에 조성된 국제도시에서 영어를 적극 활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어를 공영화처럼 사용해 외국인들이 불편하지 않게 머물 수 있도록 여건을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국제 행사나 외국 기업 유치 등 지역발전을 도모하자는 이유다.

하지만 지자체의 급격한 영어 상용화 추진은 시민단체 등의 반반을 유발했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으로 우리말과 문화의 정체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부산시, '영어상용도시' 추진 불발
인천시, '영어통용도시' 계획 수립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난달 6일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송도국제도시 영어 통용도시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 체결 및 간담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김진용 청장을 비롯 유병윤 IGC운영재단 대표, 아써 리(Arthur H. Lee) 한국뉴욕주립대 총장, 로버트 매츠(Robert Matz) 한국조지메이슨대 대표, 한태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총장, 그레고리 힐(Gregory Hill)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대표, 테드 힐(Tedd Hill) 채드윅 송도국제학교 총괄 교장 등이 참석했다. (사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난달 6일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송도국제도시 영어 통용도시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 체결 및 간담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김진용 청장을 비롯 유병윤 IGC운영재단 대표, 아써 리(Arthur H. Lee) 한국뉴욕주립대 총장, 로버트 매츠(Robert Matz) 한국조지메이슨대 대표, 한태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총장, 그레고리 힐(Gregory Hill)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대표, 테드 힐(Tedd Hill) 채드윅 송도국제학교 총괄 교장 등이 참석했다. (사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부산시는 지난해 발표한 ‘영어상용도시’ 계획을 추진했다가 한글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후 부산시는 ‘영어하기 편한 도시’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홍보하는 간담회와 시민 참여단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 라디오 영어 방송을 제공하는 부산영어방송재단을 부산국제교류재단과 통합한 부산글로벌도시재단을 출범하기 위해 지난 2월 방송통신위원회에 변경 허가를 신청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부산시가 국제교류와 외국인 지원을 담당하는 국제교류재단과 외국인 대상 미디어 홍보를 담당하는 영어방송재단을 통합하려는 이유는 국제화를 위해서다. 영어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부산을 홍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인천시도 발벗고 나섰다. 인천시는 송도국제도시를 ‘영어통용도시’로 탈바꿈하는 기본계획을 오는 6월 중 수립하고 전문가 자문을 받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하 인천경제청)은 인천글로벌캠퍼스(IGC) 입주 외국대학(한국뉴욕주립대‧한국조지메이슨대‧겐트대 글로벌캠퍼스‧유타대 아시아캠퍼스‧채드윅 송도국제학교) 등과 손을 잡았다. 인천시의 영어통용도시 정책은 오는 10월 ‘영어통용도시 선포식’에서 공개될 계획이다.

부산시의 영어하기 편한 도시와 인천시의 영어통용도시는 현재 사업 계획 수립 전 의견 수렴 단계에 있다. 구체적인 사업 윤곽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내용에 따라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이들 사업이 처음 공개됐을 때 주된 쟁점은 ‘영어 병기(竝記)’ 문제였다. 지난해 8월 부산시의 ‘글로벌 영어상용도시’ 조성 계획에는 ▲상용 공문서의 영어 병기 ▲도로 표지판과 공공시설물 영문 표기화 등 표기법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공문서 등에 영어가 남발될 것을 우려한 한글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결국 부산시는 영어 병기 부분은 덜어내고 공문서 내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 지양 등 ‘한글지킴이 사업확대’ 조건을 넣어 정책을 수정했다.

인천도 영어 병기 문제가 지적됐지만 정책 방향을 변경하지는 않을 방침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1월 ‘인천경제자유구역 영어통용도시 추진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조례’를 입법예고했다. 이때도 부산처럼 영어 남용 논란에 부딪혀 시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시 한글문화연대는 반대의견을 제출하면서 “자칫 한국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로만 의사를 표현해도 살아갈 수 있는 국민에게 영어를 써야 하는 상황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며 “인위적인 ‘영어환경 조성’은 한국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인천경제청은 한글단체 등이 지적한 ‘영어 병기’ 정책을 중장기적으로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 당시 특별법에 ‘외국인의 편의 증진을 위해 외국어 공문서 발급과 접수 등 외국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해 조례가 통과되지 않더라도 영어 통용 자체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내부 보고문서의 제목·소제목과 일부 내용을 영문으로 표기하라고 소속 직원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다만 시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외협력을 중점적으로 활용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영어 통용 도시는 한글과 영어를 같이 활용해 외국인의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투자 유치를 활성화하는 게 목적”이라며 “우리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알릴 때 한국어보다 영어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우리 문화를 알리는 수단으로써 영어를 활용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문서부터 지명까지 외국어 남발
'국어기본법' 취지에도 어긋난 행정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부산과 인천이 영어 상용화를 추진하려는 이유는 외국인들이 국제도시에서 겪는 현실적 불편을 덜자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천경제청이 지난해 말 국제기구 종사자 등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주여건상 불만족스러운 부분으로 언어가 78.3%를 차지했다.

실제로 지난 2020년에는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엉뚱한 외국어 표기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중국을 경유했던 여객선 승객을 대상으로  ‘경유'(經由) 승객을 뜻하는 영문 표기를 연료인 '경유'(輕油)를 의미하는 ‘Light Oil Passenger’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이는 같은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을 받았다.

영어 공용화 사업은 이미 제한적으로 진행된 바 있다. 지난 2020년 8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약국을 한글이나 한자인 ‘약'(藥)으로만 표기해 외국인들이 불편을 겪자 송도국제도시 전체 약국 36곳에 약국의 영어 표기인 ‘PHARMACY’ 표지판을 부착했다. 인천시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인천약국 영어 표지판 사업은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거주 외국인들의 정주환경 개선과 영어 공용화 사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글 단체들은 영어 공용화나 상용화 정책에 대해 '근거도 없고 명분도 없는 설익은 정책'이라고 지적하면서 공공언어가 훼손된다고 반발했다. 특히 공문서 등에 영어 표기를 확대하겠다는 방안은 알기 쉬운 용어 사용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국어기본법 제14조는 ‘공문서 등은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를 사용해 한글로 작성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국어원과 함께 외국어 새말 대체어 제공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새말모임'이라는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새말모임은 국어 전문가 외에 교육, 홍보, 정보통신, 언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새말모임을 통해 어려운 외래어가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다듬은 말을 제공하자는 취지다. 또한 영어가 익숙지 않은 시민들의 정보 접근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이다. 

대표적인 예로 지명에 외래어가 사용된 점을 들 수 있다. 부산시는 지난 2011년 ‘달맞이길’을 대신해 ‘문탠로드’를 상표등록했다. 이외에도 광안대교를 ‘다이아몬드 브리지’로 바꿔 부르고 센텀시티,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그린시티 등의 영어 지명을 사용했다. 조상들의 삶과 지혜가 담긴 맛깔난 고유지명이 사라지고 무분별한 외래 지명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지차체 내에서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에 제동을 거는 사례도 나온다. 최근 인천시교육청에서는 무분별한 외래어 남용과 차별 표현을 자제하고, 한글을 올바로 쓰자는 취지로 공식문서와 사업명칭 등부터 한글 순화를 하는 조례를 도입했다.

인천시의회 교육위원회는 지난 3월 22일 이오상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이 대표발의한 ‘인천시교육청 국어 바르게 쓰기 조례안’을 원안가결했다. 교육청 공문서 등을 한글로 작성하고, 각종 정책이나 행사 등의 명칭도 한글로 사용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외래어 남용은 국민 소통 단절시켜"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사진=유토이미지 제공)

영어 공용화 또는 상용화 정책에 대한 찬반 논란은 20여년에 걸쳐 진행된 해묵은 논쟁이다. 서울시와 경기도에서도 유사한 사업이 추진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인천에서도 2007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영어가 자유로운 도시' 사업을 추진했다가 무산된 바 있다.

영어 상용화 개념이 처음 대두된 시기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화 물결이 국내를 휩쓰는 상황에서 영어 활용도를 높여 국제화를 앞당기자는 요구가 들끓었다. 그해 서울연구원에서 발간한 ‘서울의 영어 상용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자료에는 “서울이 외국인 친화적 생활환경을 마련해 가고 있다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미형 공공언어학회 회장은 “영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많은 개념이 영미 문화권에서 온 문화로 채워지게 된다”며 “공공기관 등이 외래어를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말로 적절하게 대응해 찾아 쓰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외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은 소통이 어려워 단절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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