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미국 권력 서열 3위. 막강한 권한을 쥐고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 미 하원의장의 위상이다.

모처럼 하원을 차지한 공화당이 의장 선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면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몽니가 자리 잡고 있는 이번 사안은 향후 미 정치권이 트럼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상징한다.

공화당은 지난 중간선거 결과 민주당으로부터 하원 다수당을 되찾아왔다. 큰 승리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상원 다수당은 민주당에 내줬고 하원을 되찾았지만 의외로 격차는 적었다. 그래도 222석으로 하원 다수당을 차지했다는 점은 공화당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벌어졌다. 하원 의장 선거에서 케빈 매카시 공화당 원내대표가 연이어 과반 득표에 실패한 것이다. 미국 하원의장 선출이 실패한 것은 100년 만이다. 오히려 소수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의 하킴 제프리스 원내대표의 표가 더 많았다.

118대 의회 개원 첫날인 지난 3일(현지시간)에 이어 4, 5일까지도 여러 차례 투표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원 의장 선거는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치러진다. 선거를 하면 할수록 매카시 의원은 물론 공화당 지도부의 피가 마르고 있다. 미국 언론도 의회 역사상 대참사라고 연일 전하고 있다.

다수당 대표인 매카시 의원이 하원 의장 취임이 이처럼 난관을 겪을 것이라고 본 미 의회 전문가들은 드물었다. 매카시 의원이 얻은 표수가 민주당 대표가 얻은 표보다 적다는 점은 현 상황이 극히 이례적임을 보여준다.

원인은 간단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무려 20명에 가까운 친 트럼프계 ‘프리덤 코커스’ 소속 강경 보수 세력들의 반란이었다.

하원 의장 선출 파행은 2년 전인 2020년 1월 6일 벌어진 미 의회 난입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의회 내 트럼프 세력의 또 다른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 의회 난입 사건이 트럼프 지지 세력의 폭력행위였다면 이번 사태는 투표로 선출된 의원들이 정치 시스템의 핵심인 의회를 사실상 마비시킨 것이다.

이들 강경 보수파는 첫 투표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매카시 의원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음에도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다.

강경 보수파 의원들은 겨우 20명의 세력으로 416명의 의원이 대표하는 미국 전체를 마비시키고 공화당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견제에 나서라고 압박한다. 매카시 의원이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기에 부족한 인사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그들은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이 사사건건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맞섰던 것을 기억한다. 트럼프의 연설 뒤에서 연설문을 북북 찢어대던 펠로시와 같은 모습을 바라는 걸까. 강경 보수파들은 자신들의 계파 수장을 연이어 의장 후보로 내세우며 단합하고 있다.

좀처럼 해법이 안 보인다. 의장 선거는 과반 확보가 이뤄질 때까지 이뤄진다. 이들의 협조가 없다면 매카시의 하원의장 당선은 불가능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것은 강경파다. 선거는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조기에 상황을 수습하려면 강경 보수파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매카시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원의장이 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결국은 협치보다는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세 강화와 의회 협치보다는 파행이 더욱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진영 내의 불화가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는 진단도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물론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한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도 매카시 의원 지지를 표명했지만, 대다수 강경 보수파들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는다.

폐단은 이미 진행형이다. 하원은 개점 휴업 상태다. 118대 하원은 의원 취임 선서도 하지 못해 의정활동을 못하고 있다. 각종 법안이 처리되지 못 하며 민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안보 차원에서도 위기다. 911테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과 같은 국가적 위기에서 미 의회의 빠른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해도 대응이 불가능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하원 소속 직원들에 대한 임금도 체불될 정도다.

공화당의 자중지란을 보는 바이든 대통령에게도 부정적이다. 자신에 대한 공화당의 발목 잡기가 더욱 강화될 수 있고 미국 정치의 후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부끄럽다. 지저분한 싸움은 미국에 좋지 않게 반영된다. 행동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우려했다.

미국 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부상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협조가 필수다. 당연히 세계 각국도 미국 의회 상황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이를 아는 공화당 지도부도 강경파를 압박하고 나섰다. 하원 외교위원회와 군사위원회, 정보위원회 위원장 내정자인 공화당 마이클 맥카울, 마이크 로저스, 마이크 터너 의원은 공동 성명을 통해 "하원의장 공석으로 인해 바이든 행정부에 대해 견제를 하지 못하고 있고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에 대한 감독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매카시 의원이 중국에 대한 강력한 접근을 의제로 내세울 것이라면서 “개인적인 정치가 미국의 안전과 안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전문가이자 작가인 제프리 카바서비스는 "정말 걱정스러운 징조다. 민주당원들이 잠시 즐거워할 수도 있지만, 그들도 이번 사태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낙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 급진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CNN방송은 매카시 의원이 공화당 강경 보수파와 협상하기보다는 차라리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당의 협조를 받으라고 조언하는 칼럼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강경파 공화당원들을 몰아내고 하원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라는 조언이다. 그만큼 이번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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