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출범시킨 LIV 골프대회. (사진=AFP 연합뉴스 제공)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출범시킨 LIV 골프대회. (사진=AFP 연합뉴스 제공)

스포츠는 서먹한 국가 간 외교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탁구다. 미국은 1970년대 초반, 탁구를 통한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을 뚫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50여년의 세월이 지나 외교 스포츠로 급부상한 종목이 등장했다. 골프다. 미국 남자프로골프(PGA)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출범시킨 LIV의 전격적인 통합이 스포츠를 외교의 세계로 소환했다. 이번 결정은 스포츠의 세계만 영향권이 아니다. 국제정세는 물론 미국 정가에도 영향이 예상된다. 나아가 미국 대선까지도 파급효과가 이어질 전망이다.

PGA와 LIV의 전격적인 합병 결정은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사우디 방문에 나선 직후 발표됐다.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이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번 합병은 이뤄지기도 어려운 구조다. 미국 독점 당국의 결합 심사도 이뤄져야 한다. 합병 무산의 키를 쥔 미국 정부의 입장은 당연히 중요하다.

이번 결정은 중국, 러시아로 향하고 있는 사우디의 시선을 다시 미국으로 돌리게 하기 위한 혜안일 수 있다. 블링컨에 앞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사우디 리야드를 방문했다.

블링컨의 사우디 출장 목표는 다양하다. 사우디와 중국의 밀착 견제, 이란 핵 협상에 대한 지지,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유가 하향 안정 유도 등 현안이 가득하다.

사우디는 물가 안정과 러시아 견제를 위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원유 증산 요청에 오히려 감산으로 대응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 미국 정부를 당혹하게 한 바 있다.

미국과 사우디의 밀착 관계는 조 바이든 정부 들어 급변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민주 국가의 부흥을 강조하는 바이든에게 빈살만은 전제주의의 상징이었다.

반목은 거듭됐지만 이런 상황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터져 나온다. 유가 급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 악화와 함께 세계 경제 정치 질서를 요동치게 했다. 바이든은 더 이상 '검은 황금' 석유를 틀어쥔 사우디를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의 외톨이 전략과 달리 빈살만 왕세자의 국제적 위상은 최근 크게 치솟았다. 올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했다. 러시아와도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중국은 사우디와 이란의 화해를 주선했다. '학살자'로 불리는 바사르 알 아사르 시리아 대통령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더이상 미국이 사우디를 외면할 수 없는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바이든은 사우디를 얻었지만 자국 내 인권 단체의 반발이라는 문제를 맞게 됐다. 바이든은 인권과 민주주의 회복을 앞세워 진보 진영의 지지를 통해 집권했다. 이번 결정은 진보 진영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진보 진영 언론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CNN방송은 PGA와 LIV의 통합이 단일 강대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고안된 사우디의 전례 없는 외교 활동의 일환이라고 진단하고 부작용을 우려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입장도 갈린다. 공화당은 사우디와의 강력한 관계를 지지해 왔지만, 민주당은 그렇지 않다. 이는 향후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도가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백악관은 쏟아지는 비판을 비껴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합병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내가 PGA에 들어갈 계획이다"라는 농담으로 답했다. 백악관 대변인도 사우디 인권 문제와 골프 합병에 대해 연관 짓는 것을 피했다. 정권에 부담스러운 사안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 정부는 익명을 통해 사우디의 인권에 대해 지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입장을 내보였다. 한 정부 관계자는 "사우디 내 인권에 대해 사우디 관리들과 사적으로 잘 논의하고 있다"면서 "공공외교보다는 이면 외교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사우디 인권을 공식 테이블에서는 치웠음을 의미하는 발언이다.

바이든은 또 다른 부메랑의 등장도 고려해야 한다. 정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다. 다음 미국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는 이번 합병이 긍정적인 뉴스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빈살만 왕세자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트럼프는 사우디의 마음을 얻는 데도 공을 들였다. 첫 순방국도 사우디였다. 빈살만 왕세자가 트럼프를 환대하는 모습은 바이든에 대한 냉대와 대비됐다.

트럼프는 사우디의 예멘 공격도 옹호하고 나섰다. 또한 빈살만 왕세자가 관련된 것으로 의심받던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트럼프의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 전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관여하는 사모펀드인 어피니티 파트너스는 사우디 국부펀드 퍼블릭인베스트먼트 펀드(PIF)로부터 20억달러나 되는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트럼프와 사우디의 관계는 골프로도 이어진다. 트럼프는 미국 내에 여러 곳의 골프 리조트를 소유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과 영국 골프 협회가 LIV와 갈등하자 자신이 소유한 골프장에서 LIV 골프대회를 개최했다. 올해에도 트럼프가 소유한 3곳의 골프장에서 LIV 대회가 열렸다. 트럼프는 대회장을 방문해 선수들과 기념 촬영을 하는 등 대회를 즐겼다. 이런 트럼프가 PGA와 LIV의 통합이 아름답다고 자축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의회 의사당이 공격당한 후 미국 골프계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 자신이 소유한 골프장에서 예정됐던 PGA 투어 챔피언십 대회가 취소되는 일도 벌어졌다. 미국 언론들은 골프에 진심인 트럼프가 PGA 측의 조치에 격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트럼프가 LIV와 PGA의 통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정이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 7월에는 LIV와 PGA의 통합을 암시하는 발언도 했다. 그는 PGA와 LIV의 분쟁에서도 LIV가 승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약 1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의 말은 사실이 됐다. 사우디와의 밀착이 트럼프에게는 지원 세력이 된 셈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트럼프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연료가 될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도 트럼프가 재선 운동에 나선 상황에서 PGA와 LIV의 통합이 바이든에게 정치적 위협을 안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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