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블랙핑크. 블랙핑크의 베트남 공연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관련 논란에 휘말렸다. (사진=EPA 연합뉴스 제공)
걸그룹 블랙핑크. 블랙핑크의 베트남 공연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관련 논란에 휘말렸다. (사진=EPA 연합뉴스 제공)

K팝과 할리우드 영화가 중국의 영토 과욕을 전 세계인에게 각인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동남아 지역에서 벌어지던 중국과 인근 국가들의 갈등 상황을 전 세계가 알게 되는데 기여한 셈이다.

전 세계적인 팬덤을 확보한 K팝 걸그룹 ‘블랙핑크’의 베트남 공연이 기획사 홈페이지에 있던 ‘구단선’(중국이 남중국해에 그린 9개의 해상 경계선) 지도로 인해 밉상으로 전락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중국이 주장하는 구단선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부정적 감정은 콘서트 입장권 불매운동으로 이어졌다. 블랙핑크 베트남 공연 기획사가 중국계라는 사실도 베트남 국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구단선이 의도적으로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미국, 유럽,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글로벌 순회 공연을 도는 블랙핑크 때문에 동남아 지역의 갈등으로만 여겨졌던 구단선은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우연의 일치일까. 블랙핑크 외에도 최근 베트남 연예계에서 연이어 구단선이 이슈가 됐다.

베트남은 이달 들어 구단선을 다룬 중국영화 ‘플라이트 투 유’(Flight to You·向風而行)를 자국 내 넷플릭스 방영 목록에서 삭제토록 했다. 최신 할리우드 화제작 영화인 ‘바비’도 구단선 지도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베트남 상영이 불발됐다.

필리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필리핀 정치권의 상영 금지 압박 후 영화 당국은 ‘바비’에 대한 조치를 고심했다. 결론은 영화 주인공 바비의 가상여행경로가 구단선을 명확히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면서 상영 허용으로 방향이 잡혔다. 바비는 영화상에 구단선으로 보이는 장면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상영할 수 있게 됐다.

필리핀 정부가 ‘바비’ 상영을 허가한 날은 국제중재재판소가 구단선의 의미를 결론 내린 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필리핀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앞으로도 구단선을 다룬 영화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제재를 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미국 정치권도 ‘바비’ 영화를 배급하는 워너브러더스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은 “워너브러더스가 중국 공산당 선전에 협조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구단선이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구단선(九段線)은 중국이 일방적으로 남중국해 해상의 섬을 이은 해상 경계선이다. 중국은 스프래틀리 군도, 파라셀 군도, 프라타스 군도 등 섬 및 암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구단선을 고집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사실상 자국 수역이라고 주장했다.

구단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한 후 관련 수역에 인공섬을 설치하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대표적인 예가 난사군도에 설치된 중국 구조물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연관국은 물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까지 참여하면서 남중국해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을 통해 자국 군함을 해당 지역으로 출동시켜 중국의 의도를 무력화하려 했다. 베트남은 구단선에 포함된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중국군과 교전해 64명의 병사가 희생된 일도 있었다. 베이츠 질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 이사는 “중국의 구단선은 남중국해 모든 지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 선 안의 광활한 지역이 중국의 것임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국제중재재판소는 2016년 중국이 주장하는 구단선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중국은 구단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2012년부터는 여권 일부 면에 구단선을 지도 형태로 그려 넣기까지 했다. 구단선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구단선을 다룬 영화도 속속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구단선을 포장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의심을 샀다.

베트남은 구단선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바라만 보지 않았다. 2019년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스노우몬스터’, 영화 ‘언차티드’가 구단선과 관련해 베트남에서 상영금지된 일이 벌어진 바 있다. 베트남에서는 구단선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 중국이 만든 계획의 일환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베트남을 방문한 중국인의 여권에서 구단선이 그려진 면이 훼손되는 일도 발생했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경제 분야로도 이어진다. 베트남은 중국 여권 소지자가 베트남 기업 설립을 위한 대표자로 활동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인이 베트남에서 기업을 설립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하노이시 당국은 중국 여권 소비자의 근로 허가서와 범죄 사실 확인증 발급도 거부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에 구단선이 등장하는 중국 차량 수입사가 적발된 일도 있었다.

팜푸항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구단선을 내세워 제품이나 출판물을 홍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면서 향후에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프라산스 파라메스워런 미국 윌슨센터 아시아 프로그램 펠로는 베트남 정부의 반응은 구단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신호라고 설명했다. 클레오 파스칼 미국 민주주의 수호재단 펠로는 “베트남은 이번 사안은 국가 안보와 영토 차원의 문제로 보고 있다”고 부연했다. 중국 함정이 베트남 영해를 침범한 것처럼 구단선 확산 시도가 자국 영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서구 언론들은 이번 상황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스타들이 연관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는 효과가 예상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베트남 내 ‘바비’ 상영 금지가 양국 간 오랜 영토분쟁을 상징하는 사례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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