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용평가사 피치. (사진=EPA 연합뉴스 제공)
미국 신용평가사 피치. (사진=EPA 연합뉴스 제공)

신용평가사 피치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는 소식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강등한 것은 2011년 이후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등급 조정이 시장에 불러왔던 후폭풍을 기억한 전 세계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이 화들짝 놀라기에 충분했다. 우리 정부도 정부 차원에서 영향을 점검하고 나섰다.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지만 다소 결이 달랐다. 경제 전문가들과 증시 전문가들이 서둘러 분석을 내놓았지만 백악관의 대응이 두드러졌다. 하루 일정이 끝난 오후 5시에 등급 하향 조정이 발표됐음에도 휴가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백악관 대변인은 물론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까지 나서 일사불란하게 방어에 나섰다.

백악관은 출입기자들에게 피치의 조치를 비판하는 경제학자들의 평가를 신속하게 전달했다. “근거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웃음거리다" 등이 백악관이 헤드라인으로 꼽은 평가다. 이런 말을 한 이들은 물론 친 민주당 인사들이다. 폴 크루그먼, 제이슨 퍼먼, 래리 서머스, 모하메드 엘 에리언 등 학계와 금융계, 행정부에서 명성을 얻은 이들이다.

캐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피치가 사용하는 등급 모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 하락했지만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개선됐다. 세수 기반 확대를 반대하고 국가부도를 위협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하 MAGA) 공화당의 극단주의가 미국 경제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피치가 문제 삼은 국가부채 한도 협상의 위험성을 공화당 탓으로 지적한 것이다. 올해도 미국 여야는 피치의 등급 하향 조정 경고 후에도 벼랑 끝 협상을 이어가며 국가 부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키웠다. 피치는 예고한 대로 행동에 나섰다.

옐런 장관의 반박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미국의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하락, 경제성장 호조를 강조하면서 미국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안정적인 금융시장을 보유했다고 강조했다. 옐런 장관은 자신과 바이든 대통령이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부채한도 법안도 재정 적자 감소 목표 등을 담고 있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미국 행정부 고위관계자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경제팀의 입장은 공격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도 수많은 관료가 기자들과 접촉해 대응했다고 전했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국가경제위원장, 재러드 번스타인 경제자문위원장도 전방위적인 진화 작전에 나섰다.

백악관과 미국 행정부는 이번 조치에 대해 왜 서둘러 대응에 나선 걸까.

어찌 보면 피치의 등급 하향 조정은 예고된 일이었다. 피치는 지난 5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등급 하향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신호다.

신용등급 하락이 미국 경제가 부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용 등급은 미국 경제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미국 정부와 피치는 관련 협의도 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피치는 지난달에는 정부에 보고서 초안도 공유했다. 이 초안에는 등급 하향 조정은 담기지 않았다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오히려 피치 측이 극단적인 문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을 포함했다고 전했다.

피치는 미국 정가가 매년 부채한도 상향 문제를 놓고 대치하는 것이 부정적이라고 진단했다. 집권당과 관계없이 매년 벌어지는 정치권의 갈등이 경제를 갉아먹는 요인이라고 평가한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도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정부의 부채한도 증액 요청에서 시간을 끌었다. 집권당만 바뀌었을 뿐 벌어진 현상은 같았다. 정부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으니 백악관이 서둘러 진화를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다. 당연히 공격 대상은 다음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재대결을 할 가능성이 큰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옐런 장관은 피치가 인용한 모델이 트럼프 정권에서 악화했음을 부각했다.

바이든 캠프 역시 발 빠르게 트럼프 진영 공격에 나섰다. 바이든 캠프는 이번 신용등급 조정을 ‘트럼프 조정'(Trump downgrade)이라고 규정하고 혼돈, 냉담함, 무모함으로 정의된 극단적인 공화당이 야기한 결과라고 맞불을 놨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미 재선 운동을 시작한 만큼 다음 대선을 위해서도 밀릴 수 없다는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바이든과 트럼프의 내년 대선 가상 대결 지지율이 43%로 동일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트럼프에 대한 기소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그의 지지율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지 세력 결집을 자극하는 모양새다.

트럼프는 포르노 여배우와의 성 추문 관련, 기밀문서 유출, 2020년 대선 결과 뒤집기 기도 등의 혐의로 세 번째 기소를 당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지지율은 연일 상승 중이다. 기소가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공화당 경선 2위권 후보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트럼프의 격차는 어느새 30%포인트로 늘어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심지어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 "예전에도 이렇게 많은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며 고맙다고 적었을 정도다.

이번 신용등급 강등 이슈는 백악관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평가다. 역설적으로 같은 날 전해진 트럼프의 세 번째 기소 이슈가 신용등급 강등 이슈를 잠재웠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은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기소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미 미국 대중의 시선은 다음 대선에서 벌어질 바이든과 트럼프의 대결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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